[오후 한 詩] 전갈/류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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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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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 오라 했음을 알겠다



■이 시에서 ‘전갈’은,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거나 안부를 물음, 또는 전하는 말이나 안부’를 의미하는 ‘전갈(傳喝)’과 ‘전갈과의 절지동물로 꼬리 끝에 독침이 있는 곤충’을 가리키는 ‘전갈’, 이 두 가지 뜻이 한데 묶여 쓰이고 있다. 즉 나는 당신으로부터 온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고, 그래서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루비아 씨앗”일까? 사루비아의 꽃말은 ‘불타는 나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죠반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을 보면 사루비아와 관련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 어떤 연인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니 이런 맥락들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여름 내내 붉게 타오르는 사루비아를 본 적이 있다면 금방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사랑이라는 열병을 앓고 있는 중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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