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국정농단 사태와 대선까지 국정 공백상태가 이어지는 동안 동북아 정세는 급박해졌다.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호언하고, 이를 억지하려는 미국은 전쟁역량을 한반도에 집중해 자칫 우발적 상황이 초래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지속됐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주석, 아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 및 전화통화로 급변 상황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데 그간 우리는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조선조 말과 같이 한국을 패싱(Korea Passing)해서 주변국들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게 놔 둘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놓여진 가장 급한 일차적 과제는 미국 대통령부터 만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과는 긴밀한 동맹이라고 한 반면 한국은 전략적 파트너 정도로 여기는 것처럼 알려져 있다. 트럼프시대 뿐아니라 역대 미국의 대외 정책은 유럽에서의 영국처럼 동북아에서는 일본이 중요한 축(軸)으로 역할해왔다. 하지만 이런 불리한 지정학적 조건에서도 한국은 미국과 가치 일치적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한말 중국의 외교관 황쭌셴(黃遵憲)은 '조선책략'을 정책으로 제안하면서 미국과의 연합을 권한 바 있다. 그는 "(미국은) 다른 나라 영토와 인민을 탐내지 않고, 다른 나라 정사에 간여하지 않는다(不貪人土地 不貪人人民 不强與他人政事, 불탐인토지 불탐인인민 불강여타인정사)"고 설명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고종은 제1조에 명시된 양국이 제3국으로부터 불이익 받을 때 거중조정(good office)을 한다는 데 기대를 걸었다. 고종은 일본이 침략근성을 노골화하자 이승만을 파견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거중조정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이미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체결한 이후라 일본의 한국 침탈에 손을 들어줬다. 이때 이승만은 강대국들의 노름에 약소국이 허망하게 무너진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친미를 표방하면서도 항상 자기중심을 분명히 했다. 반공포로 석방, 한미방위조약 체결 등 결정적인 국가 이익 앞에서 그는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 지도자들은 미국을 너무 맹종해 제대로 외교를 하지 않고 '예스(yes) 맨'으로 전락했다. 그뿐인가. 미국에 '노(no)'하면 종북으로 몰아가는 한심한 종미자세는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비판을 적대시하는가. 오히려 비판과 반대의 소리를 외교 교섭에서 칩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사드도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결과 이제는 설치ㆍ운영비용까지 내라고 하지 않은가. 미숙한 정부가 자초한 결과다. 원점으로 돌아가 국회에서 심도있게 논의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고 재정적 부담을 주는 행위는 비준은 아니더라도 동의를 받아야 마땅하다. 또한 박근혜 정부가 사전에 아무 양해도 없이 사드배치를 단행한 것은 이웃나라에 모욕을 준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사드배치 결정 직전에 중국을 방문한 황교안 국무총리가 언급조차 안 해서 결례를 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과거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할 때 중국에서 국가원수급 인사를 북한에 보내 사전양해를 구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새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헝클어진 외교 안보의 틀을 다시 짜는 일이다. 동북아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한반도가 발화점이다. 사실 북한 3대 세습정권의 존재가 동북아 긴장 조성의 핵심원인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들이 일본에 재무장과 평화헌법 개정의 빌미를, 미국과 중국에는 군비경쟁 핑계를 제공했다. 그렇다고 주변국이 북한을 강하게 몰아세울수록 내부적으로 김정은 정권을 단합시키는 악수를 두게 된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의 대북정책은 비핵화 목표를 두고 회초리와 당근을 같이 쓰는 다층적 전략이 필요하다. 그간 미국 눈치만 보다가 꽉 막힌 우리 외교역량을 새 정부에서는 선도적으로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이종찬 前 국가정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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