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립 벗어 놓고 나뭇가지가 된 그림자가
화관 벗어 놓고 나무 이파리가 된 그림자가
조금 조심 걸어 나와서
몸속에서 완전히 걸어 나와서
몸마저 곡두로 빠져나와서
니일니일 바람을 상량했다
선사시대를 지나 르네상스를 지나 조선을 지나 강점기의 악수를 지나 애이불비, 애이불비 옷고름을 지나 흑백을 지나 칼라를 지나 오 오, 미니스커트와 포옹을 지나 전쟁을 지나 평화를 지나 나르시시즘을 지나 금기를 깬 웃음과 금기의 울음을 지나 꽃과 구름과 새를 지나 유토피아를 지나 점점 번져 검은 음각이 키운 시각(視覺)
속살을 벗은 나뭇잎들의 화동 주렴
나붓나붓 발목까지 평상을 옮겨 와 꽃을 키우고 구름을 키우고 새를 키우고
그림자가 나무의 말을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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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시는 곱씹어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보통은 한번 쓱 읽고 만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어떤 시는 글자들을 따라 쭈욱 읽고 나면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겠는데 다시 찬찬히 읽어 보면 알쏭달쏭하기만 해서 내가 대체 무얼 읽었나 싶어 민망할 때가 종종 있다. 이 시도 그런 편이다. "초립 벗어 놓고 나뭇가지가 된 그림자"라는 첫 행의 문장성분들을 원래대로 옮겨 보자면 '그림자는 초립을 벗어 놓고 나뭇가지가 되었다' 정도일 것이다. '초립'은 관례를 치른 소년이 쓰던 갓으로 가는 풀이나 대오리를 엮어 만드는데 대체로 누런색이라고 한다. 그런 초립을 벗어 놓고 나뭇가지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관례를 치른 소년'을 저 초립의 자리에 넣어 읽어 볼까, 아니면 '풀이나 대오리', 혹은 '누런색'에 눈길을 둘까? 그건 그렇다 치고 여하튼 '그림자가 나뭇가지가 되었다'고? 그리고 그 그림자가 "몸마저 곡두로 빠져나와서" "니일니일 바람을 상량했다"는 무슨 말일까? 하도 궁금해서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는데, '저도 잊어버렸어요' 그러고 한참을 웃으신다. 헐…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바로 그때 정말이지 어떤 그림자 하나가 있어 어느 참 볕 좋은 날 머리에 쓰고 있던 화관을 벗어 내려두고 나무 위로 훌쩍 환영처럼 뛰어올라 이파리 하나로 피어나는 그런 장면이 그 웃음 속에서 활짝 열리더라라고 여기에다 적으면 믿을까? 어쩌면 시 읽기는 글자 그대로를 마음속에 품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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