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여 년 전 근대과학의 산물로 탄생한 사진은 미술을 위협할 정도로 독자영역을 구축했지만, 기술의 진보가 또 하나의 경계를 만들었다. 일상에서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삶의 이면을 담아낸 앵글이 단절과 고립을 일깨웠지만, 사람들의 열광과 작가적 욕망에 스스로를 가뒀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찍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케빈 카터의 자살은 잘 알려진 사례일 뿐이다.
여러 원전지역을 돌아보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좁은 앵글에 담길 정도로 지역주민과 원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한 경계에 갇히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작업했다고 생각하는데, 왜 불안했을까? 왜 놀랐을까를 자문하면서 어느덧 의식의 바닥까지 닻을 내린 강고한 편견을 본다.
경험하지 않은 미래는 본질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지만, 사람들이 불안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원자력 사고 중계보도가 각인시킨 그 위험한 원전 바로 앞 바다에서 원전지역 사람들은 어망을 다듬으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원전 근무자들은 정해진 곳에서 절차에 따라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네 곳의 원전지역 모두 바다를 끼고 있어 원전 앞바다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의 행렬도 예상 밖의 풍경이었다. 내재된 개개인의 불안에도 묵묵히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원전이 보이는 들판 가득 피어난 유채꽃도 또 다른 작품으로 담았다. 약간의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에도 꽃들은 노오랗게 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시인의 절창은 활자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외부 접근이 어려운 도심 사무실에도, 원전 앞바다 어촌마을 조각배에도 빛을 주는 전기. 그 전기의 30%가 원자력에서 온다. 그만큼 의존도가 크고, 그에 따라 사용후핵연료도 배출된다. 이를 해결하는 일은 결국 우리 모두의 몫이다.
원자력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잠재적 위험을 위험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냉철한 시각과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여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동안 이쪽과 저쪽 경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들었다. 이제 경계의 유채꽃을 담으며 꽃 같은 마음, 꽃을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경계를 넘는다. 이것은 월장(越牆)이 아니라 융합(融合)이다.
이영섭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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