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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인식의 경계, 그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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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섭 사진작가

이영섭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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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함민복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경계는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구획을 짓고 담을 쌓고 생각을 가르면서 서로의 입장을 나눴다. 그 바탕에 과학이 있다. 혜택만큼이나 소외를 가져왔고, 편리는 위험을 내포했다. 원자력이 하나의 예다.

150여 년 전 근대과학의 산물로 탄생한 사진은 미술을 위협할 정도로 독자영역을 구축했지만, 기술의 진보가 또 하나의 경계를 만들었다. 일상에서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삶의 이면을 담아낸 앵글이 단절과 고립을 일깨웠지만, 사람들의 열광과 작가적 욕망에 스스로를 가뒀다.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찍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케빈 카터의 자살은 잘 알려진 사례일 뿐이다.
기실 경계는 본질이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의 생각이, 상황이, 입장이 만든 현상일 뿐이다. 필자가 그동안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나 계단의 텅 빈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길 넘으면 저기가 되고, 저기서 오면 여기가 되는데 왜 우리는 이토록 강고하게 서로의 인식을 구별 짓고 경계를 나누는 것일까. 이 질문을 안고 불안한 마음으로 원자력발전소를 찾았다.

여러 원전지역을 돌아보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좁은 앵글에 담길 정도로 지역주민과 원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한 경계에 갇히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작업했다고 생각하는데, 왜 불안했을까? 왜 놀랐을까를 자문하면서 어느덧 의식의 바닥까지 닻을 내린 강고한 편견을 본다.

경험하지 않은 미래는 본질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지만, 사람들이 불안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원자력 사고 중계보도가 각인시킨 그 위험한 원전 바로 앞 바다에서 원전지역 사람들은 어망을 다듬으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원전 근무자들은 정해진 곳에서 절차에 따라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네 곳의 원전지역 모두 바다를 끼고 있어 원전 앞바다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의 행렬도 예상 밖의 풍경이었다. 내재된 개개인의 불안에도 묵묵히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자식 손자까지 대를 이어 사는 삶의 터전에서 외지의 우려가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사람들, 썰물이 있기에 밀물도 있는 이치를 체감하고 사는 그들의 모습 앞에 자연스럽게 셔터를 눌렀다. 최대한 일반인의 눈으로, 예술가의 시각에서 자연스럽게 원전 주변풍경을 담고 사용후핵연료 안전관리 전시회에 사진을 출품하기로 했다.

원전이 보이는 들판 가득 피어난 유채꽃도 또 다른 작품으로 담았다. 약간의 먹구름이 드리워진 하늘에도 꽃들은 노오랗게 제 빛을 뽐내고 있었다. 시인의 절창은 활자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외부 접근이 어려운 도심 사무실에도, 원전 앞바다 어촌마을 조각배에도 빛을 주는 전기. 그 전기의 30%가 원자력에서 온다. 그만큼 의존도가 크고, 그에 따라 사용후핵연료도 배출된다. 이를 해결하는 일은 결국 우리 모두의 몫이다.

원자력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잠재적 위험을 위험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냉철한 시각과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여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동안 이쪽과 저쪽 경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들었다. 이제 경계의 유채꽃을 담으며 꽃 같은 마음, 꽃을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경계를 넘는다. 이것은 월장(越牆)이 아니라 융합(融合)이다.

이영섭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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