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7월 31일까지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교류전 '에코시스템'전

체스 졸 Pawn 시리즈, 2010년

체스 졸 Pawn 시리즈,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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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슈퍼졸, 질, 게이샤, 메닌, 턱시도, 인간주사위…. 똑같은 얼굴을 한 난장이들이 각양각색 의상과 표정으로 둥근 원을 이루고 있다. 천연수지와 스티로폼을 활용해 유화로 색칠한 미니어처다. 장난감 가게에 들어온 듯 다분히 유희적이고 코믹스럽다. 하지만 이 속에는 '자기 복제' 혹은 '정체성에 대한 정의'라는 철학적 질문들이 숨겨져 있다. 작가는 "정체성이란 시간 속에서 변할 수 있는 것이며, 고유한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다"란 가설로 출발한 '클론' 시리즈를 구상했다. 이 가설은 문학, 철학 등 장르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내용이어서 그것 자체가 참신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를 시각적으로, 작가 자신에 대한 탐구로 표현한 방식이 꽤 독창적이다. 작가가 본인의 신체를 주물로 떠 선보인 자화상에 관한 사유다. '체스 졸(Pawn)'이라 이름 붙인 작품들은 잠재적으로 제한 없는 캐릭터를 나타낼 수 있는 오브제를 의미한다.


남태평양 바누아트공화국에는 '나골'이라 불리는 의식이 있다. 바누아투인들은 번지점프를 하듯 발이 묶인 채 20미터 높이의 나무탑 위에서 몸을 던지는 이 의식이 대지를 비옥하게 만든다고 믿어왔다. 20대 부터 60대 남성들은 땅바닥에 거의 머리를 스칠듯 위험한 투신을 한다. 질루크 라인하르트의 소설 '인간주사위(The Dice Man)에서 영감을 얻어 '인간주사위'를 만든 작가는 이 인간주사위로 하여금 나골 의식을 치르게 한다. 인간주사위는 결국 추락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모험을 감행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바누아트 출신 작가 질 바비에(Gilles Barbier)가 지난 13일부터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교류전 '에코시스템(Echo system)'을 열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질 바비에가 이뤄온 작품 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 자가 증식하는 작가의 사유체계를 살펴 볼 수 있는 드로잉, 회화, 설치 작품 100여 점이 전시장에 입체적으로 설치됐다.


작가 질 바비에(가운데) 독립큐레이터 갸엘 샤보(오른쪽)

작가 질 바비에(가운데) 독립큐레이터 갸엘 샤보(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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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바비에의 블랙드로잉 중 하나

질 바비에의 블랙드로잉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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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함께 방한한 독립큐레이터 갸엘 샤보는 "질 바비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사하며, 관찰하고 분석하는 예술 분야에서 단연 돋보이는 실력자 중 한명"이라며 "그가 1990년대 초부터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작품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들이다. 작가는 모든 종류의 지식과 문화 정보를 활용한다. 과학, SF, 예술사, 문학, 생체해부학, 유머 등 다양한 기법으로 모든 것을 소화하고 조합하며 만화가가 되기도 하고 조각가가 되기도 한다"고 소개했다.

질 바비에는 영국의 수학자 존 콘웨이(John Conway)의 '생명게임(Game of Life)' 원리를 종종 본인의 작품 세계와 비유해 설명한다. '생명게임'은 임의적으로 배열된 세포들이 기본 법칙에 의해 자동으로 생성, 소멸하면서 삶과 죽음 그리고 증식의 퍼즐을 만들어 낸다는 개념이다. 작가는 "생명게임은 1970년대 고안된 소프트웨어 이름에서 착안한 자가 복제 시스템을 의미한다. 인공지능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미술이 스스로 생겨날 수 있는 힘에 관심을 가졌다"며 "(작품에서) 나 자신과 사회를 증식시키고 사멸시키고, 복제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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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일요일마다 작업해온 '사전페이지와 오탈자'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질 바비에. 현재까지 프랑스어 A부터 M까지 진행중이다.

매주 일요일마다 작업해온 '사전페이지와 오탈자'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질 바비에. 현재까지 프랑스어 A부터 M까지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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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입구에는 대형 '사전 모사' 작품이 걸려있다. 작가는 지난 1992년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재미삼아 일요일마다 프랑스어 사전을 베껴나갔다고 한다. 첫 알파벳 A부터 시작해 현재 M까지 완성됐다. 대형 캔버스에는 만년필로 새겨진 글씨와 과슈물감으로 그린 이미지가 빼곡하다. 작가는 "나만의 작업방식을 고안하고 싶었다. 그리고 일요일에 무언가 하게 된다면, 거대한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고 서재에 있는 가장 큰 책인 사전을 고른 것"이라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작업을 대하는 마음이 진지해졌다. 이 작업은 추후 블랙 드로잉에도 영향을 미쳤다. 작품 활동 과정에서 디저트와 같은 부분"이라고 했다.


질 바비에는 20세에 프랑스로 건너가 마르세유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마르세유를 근거지로 활동해 온 조형 예술가이다. 작가는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아틀리에가 늘 열려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기에 작가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아틀리에는 고독한 작업실이 아닌, '예술가들의 사랑방'이다. 그는 '21세기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작가란, 예술이란 하나의 배를 타고 탐험하면서도 자신만의 배를 타고 외적인 공간에서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오는 7월 31일까지. 02-3701-9500.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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