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밀러 원작 오는 14일부터 예술의전당

해고된 세일즈맨과 그 가족들의 삶·갈등 통해
사회와 자본주의의 부조리 담아
이번 공연선 인물의 내면에 집중
대사 줄이고 무대·음악으로 표현


윌리 로먼 역의 손진환(사진=예술의전당 제공)

윌리 로먼 역의 손진환(사진=예술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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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저는 이 회사에서 34년을 일했는데 지금은 보험금조차 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오렌지 속만 까먹고 껍질은 내다 버리실 참입니까? 사람은 과일 나부랭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에 등장하는 주인공 '윌리 로먼'의 외침이다. 세일즈맨인 그는 자신을 해고하려는 사장 '하워드'를 찾아가 일주일에 50달러짜리 일이라도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사장은 새로 장만한 최신 녹음기에 몰두할 뿐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윌리는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이웃집 친구 찰리에게서 돈을 꾼다. 꾼 보험금 150달러를 쥐곤 혼자 읊조린다. "정말 황당하군. 일에 이리저리 끌려 다닌 뒤 시간이 흘러 남는 거라곤…. 죽는 게 더 돈을 많이 벌잖아."

한태숙(66)이 연출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이 오는 14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다.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가 1949년에 쓴 희곡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ㆍ연극비평가상ㆍ앙투아네트 페리상 등 3대 연극상을 휩쓸었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1930년대 경제대공황기를 배경으로 세일즈맨 윌리 로먼의 지친 삶을 통해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윌리 로먼과 린다 역의 예수정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윌리 로먼과 린다 역의 예수정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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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만 해도 윌리 로먼(손진환)은 성공한 남자였다. 주당 수수료만 170달러가 넘었다. 새 가구가 들어찬 새 집에는 촉망 받는 미식축구 선수인 큰 아들 '비프'(이승주)와 말 잘 듣는 둘째 아들 '해피'(박용우), 현명한 아내 '린다'(예수정)가 있었다. 하지만 1920년대 말 불어 닥친 경제대공황으로 윌리 로먼의 '아메리칸 드림'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나이 60을 넘긴 그에게 남은 거라곤 할부가 끝나지 않은 낡은 집과 매번 수리해야 하는 고물 냉장고, 빗나간 아들들뿐이다.


아서 밀러는 이 작품 속에 자신의 경험을 녹여냈다. 그 역시 경제대공황기 봉제공장 문을 닫은 아버지를 대신해 접시 닦기, 빵 배달을 하며 생계와 학업을 병행했던 터였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1949년 2월 10일 뉴욕 모로스코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당시 관객은 '변화하는 사회, 버려지는 개인'에 주목했다. 관객은 소시민 윌리 로먼을 자본주의에 의한 희생자로 여기며 그에게서 자신 혹은 가족을 보았다. 미국 대선에 도전하는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의원 역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페인트칠을 하는 아버지에게서 윌리 로먼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해피 역의 박용우와 비프 역의 이승주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해피 역의 박용우와 비프 역의 이승주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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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 작품의 메시지는 머나먼 땅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큰아들 비프는 부르짖는다. "매일 아침마다 미어터질 것 같은 지하철 타고 출근하고 2주짜리 휴가 하나 얻으려고 나머지 350일 동안 죽어라 일만 하라고?" 그의 대사는 지난해 개봉한 국내 영화 '오피스'에 등장하는 홍지선 대리(류현경)의 외침을 떠올리게 만든다. "내가 죽으려고 일하는 건지 살려고 일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지난 6일 예술의전당에서 '세일즈맨의 죽음' 제작발표회가 열렸다. 이 자리엔 한태숙 연출과 드라마터그 강태경(54)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부 교수, 윤색을 맡은 고연옥(45) 작가 등과 주요 배우들이 참석했다. 강 교수는 "명작이라는 건 특별한 변형 없이도 오늘날뿐 아니라 어느 시대의 현실과도 맞물려 돌아간다. 이번 작품은 다른 고전에 비해 문화적 번역 작업에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드라마터그는 '문학적 조언자'로서 작품이 당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문학적 분석과 어긋나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사실 아서 밀러는 대중의 반응과는 달리 이 작품을 통해 '사회와 개인의 갈등'보다는 '인간 내면의 모순'을 표현하길 바랐다. 극중 윌리 로먼은 현실과 과거,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신 이상에 빠진다. 그는 현재가 괴로워 지난날의 행복으로 도피하면서도 출장지에서 바람을 피우고 아들의 도둑질을 부추기던 과거의 자신을 보며 괴로워한다. 이렇듯 작품은 모순으로 가득한 인간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이번 공연은 아서 밀러의 의도대로 과거의 무대들이 구현해내지 못한 '등장인물의 내면'에 조금 더 집중할 계획이다. 강 교수는 "그간 대중적 성공으로 인해 묻힌 원작에 내재하는 힘을 끄집어내기로 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연출가는 언어와 무대, 음악을 고루 사용하려 한다. 원작의 중심은 '언어'였다. 관객은 윌리 로먼이 끊임없이 주절대는 말을 통해 그의 내면을 이해해왔다. 이번엔 언어를 5분의 3으로 줄이고 영상디자이너 김장연, 소품디자이너 김상희, 조명디자이너 김창기, 음악감독 지미 세르 등과 함께 시청각적 효과를 더해 연극적 재미를 제공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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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집을 에워싼 거대한 구조물은 윌리 로먼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다. 그의 정신 분열이 심해질 때면 오른쪽 천장에선 윌리 로먼의 허상 덩어리를 상징하는 6m 크기의 오브제(제작중)가 흔들리며 부각된다. 그가 보험금 2만 달러를 얻기 위해 자동차 사고로 자신의 목숨을 세일즈 할 때 그 오브제는 바닥에 떨어진다.


한태숙은 "연극은 결국 절절하게 인간에 대한 공부를 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사는 수많은 윌리 로먼이 작품을 보기 위해 찾아오기를 바란다. "그는 대의를 위해 장엄하게 죽는 영웅도 악인도 아니다. 그는 사회에 의한 피해자임과 동시에 욕망에 의해 자신을 분열하는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곧 우리다."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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