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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귀신들은 어떻게 사라져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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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를 찾아서'

TV귀신들은 어떻게 사라져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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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60년대 라디오 드라마 '전설따라 삼천리' 제작 현장에서 한 여자 아나운서가 기절했다. 긴장이 고조되는 대목을 녹음하고 있을 때 옆 부스에서 지켜보다가 겁에 질려 그만 쓰러져버린 것이다. 시그널 음악인 드뷔시의 '조각배(En Bateau)'만 들어도 간이 졸아들던 이 연속극은 66년 5월부터 방송됐고 이듬해 67년 한국 여귀(女鬼)의 기준을 세웠다는 영화 '월하의 공동묘지'를 낳는 촉매가 된다. 또 68년엔 장일호 감독의 영화 '전설따라 삼천리'가 개봉됐다.

드라마를 흥행시킨 데는 해설자 유기현씨의 산신령같은 말투도 한 몫을 했다. "강원도 두메산골에 맘씨 고약한 시어머니와 곱디고운 며느리가 살고 있었으니... 하늘이 감동하여 도왔던 것이었습니다그려." 시골 노인들이 버스를 빌려 방송사로 유씨를 만나러 왔는데 삼십대인 그를 보고는 "진짜 유기현씨 불러와"라며 돌려세우기도 했다. 78년 10월 마지막 녹음 때 해설하던 유씨가 유난히 비통하게 울었다. 알고보니 폐암 말기였다. 유기현은 그해 방송대상 연기상을 탄 뒤 곧 세상을 뜬다. 이 드라마는 4408회라는 장수 기록을 세웠지만 막판엔 소재가 바닥 나 비슷한 얘기들이 반복됐다. "날마다 용이 승천하니, 이제 하늘이 꽉 차서 용이 더 들어갈 자리도 없겠다"는 핀잔을 들었다.

77년엔 TV가 '전설의 고향'을 내놓는다. 흑백 산수화를 배경으로 한자 제목 로고가 으스스하게 비치던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TV는 라디오가 자아낸 공포를 좀더 실감나게 재현하려고 애를 썼다. 저마다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냈던 무서운 이미지들이 TV에서는 늘어뜨린 머리칼과 입가의 핏물, 기괴한 눈 따위의 구체적인 것들로 표현된다.

최고 히트작은 그해 만들어진 ‘덕대골’(충북 영동군) 전설이었다. "내 다리 내놔라!"는 절규는 안방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덕대는 널에 시신을 놓고, 초가지붕에 쓰던 짚으로 덮은 허술한 무덤이다.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인육(人肉)을 고아 먹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여인은, 생각 끝에 덕대골에 가서 갓 죽은 이의 신체를 절단한다. 빗속에 다리를 들고 뛰는 여인 뒤에서 벌떡 주검이 일어나 고함을 치며 앙감발로 추격해오는 장면이 압권이다. 이 작품은 지난 6월 작고한 유현목 감독의 영화 '한(恨)'(67년 개봉)이 모태가 되었다고도 하나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확인하긴 어렵다.

기이한 효과음을 들으며 마음껏 상상을 펼치던 라디오의 귀신에 비해, TV의 '비주얼 귀신'은 왠지 싱겁다는 얘기도 나온다. 또 흑백귀신보다 컬러귀신이 못하다고도 한다. 귀신이 더 현란해지고 생생해지면서, 오히려 상상력를 제한해버렸기에, 라디오에서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공포물들은 슬그머니 퇴장하고 만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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