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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물든다는 것(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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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봄날 나뭇잎은 노랑에 가까운 연두빛 잎을 내밀어 조금씩 조금씩 짙은 녹색으로 갈아입는다. 봄날에서 늦여름까지 내내 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 연두가 진녹색으로 되려면, 파랑색(전문용어로는 사이언 cyan)이 그 속에 섞여 숨어들어야 한다.

그런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면서 진녹색의 나뭇잎들은 빨갛게 혹은 노랗게 바뀐다. 훨씬 짧은 기간에 녹색 속에 들어있던 파랑색을 다시 버리는 것이다. 파랑색만 빼는 경우는 노랑잎이 되고 거기에 새롭게 빨강을 담으면 금적(노랑과 빨강이 고루 섞인 고운 빨강)의 단풍잎이 된다.
파랑이 숨어들어 녹색이 짙어지는 나뭇잎을, 우린 물든다고 말하지 않지만, 녹색에서 다시 파랑이 빠지면서 노랑으로 바뀌고 빨강으로 바뀌는 것은 물들었다고 말하니, 이건 왜 그럴까. 나뭇잎이 진녹색으로 물들었다는 얘기는 없지만, 나뭇잎이 빨강과 노랑으로 물들었다는 표현은 있다. 색깔이 바뀌는 것은 매 한가지인데, 왜 물든다는 말은 단풍에만 쓰이는 것일까.

이것은, 색깔의 본령을 어디에 잡느냐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나뭇잎 빛깔의 본령은 봄날의 것이 아니라 여름의 무성한 시절에 있다는 생각이 물들이는 기준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봄날에서 여름으로 오는 것은, 자기의 '물'인 진녹색을 갖춘 것이며,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변화는 그 진녹색의 물에서 다른 물을 들이는 것이 되는 셈이다. 가을이 주는 놀라움은 나뭇잎들이 일제히 제 본령을 놔버리고 다른 물을 들이며 삶을 전환하는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물이 빛깔과 동일시되는 것은, 염료를 사용해온 인류문명의 오랜 기억이 외삽한 결과일 것이다. 옷감에 물들이는 경험은, 영혼이나 정신에 대한 은유에서 생생한 비유가 된다. 한 인간을 물들이는 일은, 인간에게 어떤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며 신념이나 사상이나 사유체계를 바꾸는 일이다. 공산주의가 부정적인 가치로 심어지는데 기여한 말은, 붉게 물들인다는 표현이 주는 힘도 크지 않을까 한다. 벌거숭이의 본질적 평등을 강조한 적라(赤裸)의 사유와, 파르티잔에서 나왔다는 빨갱이의 우연한 붉음이 겹쳐져, 이보다 더 선명한 물들임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굳은 클리쉐가 되었다.
물들인다는 말은, 그 본령을 어디에 두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붉은 물을 들이는 것에 대한 경계는, 그 본령을 '물 들이기 이전의 상태'에 두어야 한다는 오래된 강박의 표현이기도 하리라.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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