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실례가 스티브 잡스와 추사 김정희다. 스티브 잡스는 대학생활이 싫증나고 따분해 전공을 뒤로 한 채 디자인 강의를 자주 들었다. 잡스는 서로 다른 문자와 글씨체가 아름답고 다양하다는 사실에 감동해 틈틈이 글씨체 디자인에 열을 올렸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도 잡스의 글씨체 디자인은 멈출 줄 몰랐다.
우리에게도 잡스같은 인물이 있다. 사실 그의 캘리그라피에는 잡스조차 발끝을 못 따라간다. 추사 김정희((1786~1856년)다. 추사는 24살 때 아버지를 따라 넉달 반 동안 중국 연경을 다녀 오면서 다양한 서책과 서체, 비문(碑文)을 접했다. 이후 추사는 문자 판독 및 연구, 서체 개발에 평생을 바쳤다. 또한 '금석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조선 후기의 지식사회를 이끌었다. 추사의 독창적인 캘리그라피인 '추사체'에는 학문과 예술, 기술을 조화시키고자 했던 정신이 담겨 있다.
글씨체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 선조들은 글씨체속엔 쓰는 이의 내면과 성품, 얼이 있다고 여겼다. 또한 글씨 쓰기의 예술, 즉 서예는 선비의 기본 학습과정이며 덕목으로 이해했다. 서예는 학문과 예술, 손끝으로 모아지는 기술, 선비의 정신 수양을 집약한다. 오늘날 컴퓨터 좌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잦아지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예술 '서예'의 세계가 다시금 펼쳐지고 있다.
조선 중기는 성리학이 학문과 문화의 전반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융성하던 시기다. 당시 이황(李滉, 1502~1571)은 “글씨의 법은 마음의 법을 따라 나오는 것이니, 글씨를 쓸 때 유명한 글씨만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이는 중국의 유명한 글씨체만을 따라 쓰는 것을 경계해 이른 말이다.
이에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중국 조맹부의 서체인 송설체, 왕희지체 등의 고법이 여러 성리학자들에 의해 재해석됐다. 이어 한호(韓濩)의 석봉체(石峰體)가 출현하는 등 조선만의 캘리그라피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초서(草書)에서는 황기로(黃耆老, 1521~1567) ·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전서(篆書)에서는 허목(許穆, 1595~1682) 등이 특유의 서풍을 이뤘다. 이후 윤순(尹淳, 1680~1741)을 필두로 이광사(李匡師, 1705~1777) 등 걸출한 명서가들이 대거 출현해 18세기 조선화된 서풍이 완성됐다. 조선 중기의 선비들은 성리학적인 의리와 명분 등 그들이 추구했던 정신세계를 글씨에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형태를 중요시하기보다 내용과 정신에 의미를 두는 경향이 강했다.
이번 교체전시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준필 당나라 유장경 시', '윤순거필 송나라 소옹 시', '성종어필 격언' 등 조선 중기 글씨로 걸출했던 선비와 왕들의 글씨가 대거 선보인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서예가인 오준(1587~1666)은 석봉체를 따라 단아한 모양의 해서(楷書)를 잘 썼다. 그가 쓴 당나라 유장경의 시에서도 단정한 느낌을 잘 보여준다. '윤순거필 송나라 소옹 시'에서는 중국 왕희지(王羲之)와 회소(懷素)의 필법을, 송나라 소옹(邵雍)의 시에서는 시원스럽고 변화 무쌍한 초서의 운필을 느낄 수 있다. 왕의 글씨로는 성종과 선조가 쓴 작품이 전시돼 있다.
성종은 작은 부채면에 단아하게 '명심보감', '중용' 등에서 교훈이 될 만한 좋은 글귀들을 적었다. 그의 끌씨체에서는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지키고 왕도정치를 구현하려던 성종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전시에는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탁본, 남인의 거두이자 전서의 대가였던 허목의 인장도 첫 공개됐다.
예로부터 글씨는 사람의 인격이나 학문을 반영하는 거울로 비유돼 왔다. 꽃피는 봄날, 햇빛과 함께 서예를 즐겨봄직하다. 이번에 교체된 작품은 오는 8월24일까지 전시된다.
이규성 기자 peac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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