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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사흘 사랑하고 천일을 그리워하리(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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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33)
[千日野話]사흘 사랑하고 천일을 그리워하리(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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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매가 핀 아침, 가슴이 쿵쾅거리는 두향을 위해 시 한 편을 바친다.

늦은 사랑이 내게로 왔다
가장 늦은 사랑이 첫사랑이다
봄여름가을
꽃시절 다 놓치고
언 땅 위에서
붉어졌다
누구는 나를 가리켜 봄이라 하지만
꽃물을 길어올린 건
겨울이다 인색한 몇 올의
빛을 붙들어 온몸을 태운
한 그리움의 실성(失性)

그리워할 누군가가 있는가
지금 그리워해도 되는가
너는 묻지 않았으니
스스로 터져 봄날이 되는
한 떨기 마음의 길이여
얼어붙은 허공에 뾰루퉁 입 내민
붉은 접문(接吻)
하늘 아래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
태초의 사랑이 내게로 왔다

이빈섬의 <첫사랑>

두향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화장 거울 앞에서 오래 제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철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기적(妓籍)에 올랐지만 남에게 굳이 곱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 별로 없었다. 몸이 기생이지 마음까지 기생은 아니라고 속다짐을 하며, 경전도 읽고 그림도 익혔다. 춤과 노래와 거문고도 단순한 기예로 배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의 깊은 의미까지 이해하고 싶어했다. 틈틈이 시를 읽고 때로 스스로 지어보기도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시를 깊이 이해했기에 두향의 춤은 시의 풍류를 풀어냈고 노래는 시의 행간을 읽어냈으며 또 거문고는 시의 음률과 미감을 옮겨냈다. 퇴계는 그녀의 그런 점에 놀라워했다. 매화를 키우는 일은 신산한 자신의 내면을 다지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겨울을 견디는 꽃나무를 보며 삶의 의미를 풍성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수행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이 왜 이 꽃에 열광하는지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탐욕과 편견으로 가득 찬 숱한 벼슬아치를 만나면서 그녀는 일찍이 마음의 문을 닫아 걸었다. 그녀의 어미 노릇을 했던 퇴기(退妓) 매향은 딸의 이런 마음을 알아채고, 두향의 성격이 별나고 괴팍하다는 소문을 수시로 내서 뭇사내들의 눈길을 가려왔다. 그렇게 보내온 세월이었다.
이제 스물 다섯이 되는 봄날. 두향에게 퇴계를 만나기 이전과 만난 이후는 너무나 다른 삶이었다. 퇴계는 그녀를 알아주는 사람이었고,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연 사람이었다. 기생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시와 예술과 생각을 나누는 벗으로 대하는 진심을 느꼈다. 분명 크고 높은 사람이었지만, 스스로를 낮췄으며 말 속에 해학(諧謔)과 여유를 지니고 있었으며,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두향의 말을 경청했다. 이토록 매력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가만히 말했다.

"백일두향 삼일영춘 천일모영(百日杜香 三日迎春 千日慕影)"

백일 동안 그 향기 숨겨두었는데
사흘 햇살에 봄을 열어주었구나
천일을 그 그림자 그리워하리

두향은 도수매 화분을 햇살에 꺼내놓고 정성껏 닦는다. 어린 노복을 시켜 그것을 동헌 뒤에 있는 내당 앞마루에 두게 하였다. 노복이 물었다. "이제 겨우 꽃 한 송이 핀 것을, 웬 호들갑인가. 이토록 서둘러 사또 나으리께 보내는 까닭이 뭔가. 며칠 더 기다렸다 활짝 핀 것을 보여드리면 더 좋아하시지 않겠나." 두향이 웃으며 말했다. "꽃이란 여러 송이 피었을 때도 볼 만하지만, 처음으로 하나가 벙글 때가 더욱 귀하고 아름답단다. 선비들은 첫 개화일을 택하여 모임을 가지기도 하지. 저 첫 송이를 내밀 때 매화 향기가 가장 맑고 그윽하기도 하고..."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동침 약속했던 그 매화가 피었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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