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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단양팔경을 정해볼까요(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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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31)

[千日野話]단양팔경을 정해볼까요(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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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은 조선왕실이 성학(聖學)의 교과서처럼 여겼던 책이기도 하다. 왕들은 심경을 읽으며 지도자의 마음수업을 했다. 퇴계는 이 책을 조선에서 재발견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중국에서도 주목하지 않던 '심경'은 퇴계에 의해 유학의 핵심경전으로 부각되었다. 도산에 물러나 은거할 때 아침에 일어나면 이 책부터 낭송했다고 한다. 그가 경(敬)의 태도를 일생동안 관철한 것도, 심경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퇴계가 심경에 관해 관심을 드높이고 자기의 철학적 기반으로 삼은 데에는, 이날 이지번과의 대화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퇴계는 성암 이지번을 위해 이런 시를 읊었다.

형승구담승도담(形勝龜潭勝島潭)이던가
보는 아름다움은 구담이 도담보다 낫던가

* 이 구절에는 절묘한 암시가 있다. 구담과 도담은 모두 단양에 있는 아름다운 경치인데, 여기서 구담은 구담노인인 이지번이며 도담은 도담삼봉에서 호를 취한 삼봉 정도전(1342-1398)을 함의한다. 정도전은 조선 왕실의 기틀을 설계한 대유학자였으나 왕권과 신권(臣權)에 대한 왕실과의 견해 차이로, 왕조 출범 과정에서 제거되고 말았다. 이지번을 정도전과 나란히 놓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대비인데, 퇴계는 구담이 더 낫다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뼈가 있다. 정도전은 그 사림의 천하를 실천하려는 꿈을 접었지만 이지번은 심경(왕의 마음체계를 포맷하는 유학자들의 책)을 읽으며 그 뜻을 다시 다지고 있지 않은가.
가능이취결모암(可能移就結茅庵)이구나
이사를 와서 초가암자를 지을 수 있지 않은가

*도담삼봉은 작은 섬인지라, 거기에 들어가 살기에는 부적당하다. 뜻을 세웠으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함의를 거기에 담았다. 정도전의 뜻은 컸으나 저 삼봉처럼 사람들이 기거하기에는 부적합했다.

타년아역심군거(他年我亦尋君去)하여
뒷날에 나도 그대를 찾아가

* 이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관직에 있던 퇴계가 이지번을 찾아가겠다는 메시지는, 은둔을 향한 열망을 표현한 것도 되지만, 심경(心經)을 읽으며 초심을 다지는 저 삶에 합류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백석청운포공참(白石靑雲飽共參)하리니
흰 돌 푸른 구름을 실컷 먹는 일에 동참하리니

* 흰 돌은 옥순봉(玉筍峰)이다. 구담을 내려보고 있는, 희고 푸른 순(筍)처럼 돋은 봉우리로, 옥순봉이란 이름을 지은 이가 바로 퇴계이다. 옥순봉을 감아도는 구름을 배부르게 먹겠다는 말은, 육신의 가난과 정신의 포만을 기발하게 겹쳐놓고 있다. 청운은 세상을 바꾸려는 지식인의 큰 뜻을 의미하기도 하니, 이 또한 정도전의 이미지가 다시 되살아나는 대목일 수 있다.

단구정 모임의 자리를 파하면서 퇴계는 이지번과 이지함을 향해 말했다.
"다음에 뵈올 때에는, 단양의 8경을 꼽는 일을 같이 해보고자 합니다. 빼어난 경승(景勝)을 지닌 고장이라면 그것만을 보배로 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명승(名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붙여진 이름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 풍경을 마음속에 더욱 깊이 각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글을 쓸 때 그 이름을 소재로 삼고 그 의미를 이야기로 풀어낼 것입니다. 8경을 정하면 많은 이들은 그 이름을 따라 찾아오며 이름을 따라 즐길 것입니다. 일행이 유람한 뒤 각기 하나씩 짓도록 하면 어떨까요?"

이지번이 말했다.
"사또와 공서, 저와 토정, 그리고 저 두향까지 다섯이군요. 제게 열살배기 아들이 하나 있는데 산해(山海)라고 합니다. 어리지만 제법 생각이 깊어 쓸 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토정에게서 학문을 닦고 있습니다."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퇴계와 이지번, 心經을 말하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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