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선의 世·市·人] 지기(知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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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이 외국인에게 그 곁을 내준 지 21년이 지났고,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겁박(劫迫) 속에 망연자실하여 증시의 빗장을 완전히 풀어버린 뒤로도 해가 열여섯 번이나 바뀌었다. 가공할 만한 글로벌 유동성을 앞세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가 반복되면서 한국 자본시장은 서구 열강 자본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1992년 자본시장개방과 함께 외국인-기관-개인으로 구축된 정족지세(鼎足之勢)의 불안한 균형은 외국인의 거침없는 행보로 자주 무너졌다. 그들의 인식과 평가가 시세의 표준이자 시장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되었다. 시장의 모든 변수는 '외국인동향'이란 상수로 압축되고 통합돼 그 개별적 영향력을 상실했고, 외국인의 힘은 시세의 생장(生長)과 쇠멸(衰滅), 전 과정을 엄밀하게 통제했다.

지난 21년, 외국인의 투자성적표는 찬란하다. '92년 이후 외국인은 52조원어치를 순매수해 이를 410조원으로 늘렸고, 배당으로만 53조원을 챙겼다. 투자원금 52조원을 모두 회수하고도 남은 셈이니, 410조원으로 평가되는 보유주식은 그대로 순이익이다. 이 기간 코스피지수의 상승률이 228%인데 외국인의 수익률은 무려 786%로 세 배가 넘는다.


무슨 낌새를 챈 것일까? 외국인이 사상 최장기 연속 순매수기록을 연일 경신하며 집요하게 시장공략에 나섰다. 미국의 양적완화(QE) 출구전략의 여파로 표류하던 시장의 허점을 날카롭게 찌르며 달려든 것이다. 지난 8월23일~10월 23일 39거래일째 주식을 사들였다. 순매수 규모는 13조원을 넘는다. 환율은 급락하고 코스피 지수는 반등하는 데도 왕성한 식욕은 지칠 줄 모른다. 경제를 확신하지 못하는 개인과 기관은 매도로 맞섰다. 일탈(逸脫)에 가까운 외국인의 순매수 행진을 둘러싼 해석도 분분하다. 지난 22일 국제금융센터는 "외국인의 순매수는 경제 펀더멘털과 가격 기술적인 측면에서 한국 증시의 매력이 커진 데 기인한 것"이라는 분석에 "대내외 변수에 따라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일부에서는 외국인 주도의 유동성 랠리가 계속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공자는 주역 계사전에서 "기미란 그 신묘함을 아는 것이구나! 기미는 변동의 미미한 움직임이고 길함이 미리 드러나는 것이다. 군자는 기미를 보고서 작정하여 해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知幾其神乎 幾者動之微 吉之先見者也 君子見幾而作 不佚終日)"라고 했다. 세상만사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그 변화의 미미한 조짐이 기(幾)다. '지기(知幾)'는 그 미세한 조짐을 꿰뚫어 보고 변화의 방향을 미리 판별해서 화(禍)를 방지하거나 길(吉)함을 추진하는 능력이다. 지금 외국인이 무슨 기미를 포착하여 저토록 연일 순매수에 분주한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개인이나 기관투자가는 '외국인의 순매수 행진'이라는 사실만을 기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답답한 현실에 갇혀 있다. 제로섬 게임이라는 비정한 법칙이 작동하는 파생상품시장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은 '사는 자'와 '파는 자'의 치열함 다툼으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투자'라는 이름으로 주식시장에서 벌어지는 머니게임의 속성이고 보면, 그저 바라만 보다가 앉아서 좋은 기회를 놓치거나(坐失良機), 뒷북을 치다가 이 수상한 랠리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떠안아 낭패를 당하는 처지를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전국시대, 인간 재신(財神)'이라고 불렸던 백규(白圭)는"시세의 변화를 낙관하여(樂觀時變), 때를 알고, 남들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남들이 취하면 나는 준다(人棄我取,人取我與)"라는 '천하치생(天下治生)'의 도를 설파했는데 그 요지는 바로 '지기(知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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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履霜堅氷至)'했던가! 가을이 깊어간다. 곧 겨울이 올 것이다.


정병선 성균관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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