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대신 살자] 자살 유가족 한해 10만명, 자살 고위험 노출
"살아남은 자의 슬픔·죄책감 잊고 악순환 끊도록 관심 필요"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 "언니가 그립다." 둘째 딸은 그렇게 제 언니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울증을 앓던 큰 딸이 자살로 세상을 등진 지 딱 일주일 만이었다. 불행은 연이어 A(여)씨를 덮쳤다. 두 딸을 허망하게 잃은 것도 모자라 남편마저 한 달 뒤 저세상으로 갔다. 한꺼번에 가족을 셋이나 떠나보낸 그는 말이 좋게 나갈 리 없었다. 툭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나보다 힘드냐"며 쏘아붙이기 일쑤였다. 처음 A씨가 '한국 생명의전화'가 운영하는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유가족 자조모임ㆍ이하 따사모)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를 두고 '가시 돋친 고슴도치 같았다'고 했다.
# 2009년 홀로 자취생활을 하던 대학생 딸이 자살한 B(여)씨는 삶이 딸의 자살 이전과 180도 바뀌었다. 아직 그는 딸의 유품 정리를 하지 않았다. 딸의 유골도 집에서 보관한다. 딸의 돌연한 자살 이후 남편은 술에 의지하다 알코올 중독자 신세가 됐다.
자살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상실감, 죄책감, 자신에 대한 원망 등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정신질환 약을 복용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 자살연구협회는 한 명의 자살 뒤에 직접적인 정신적 외상을 입는 자살 유가족이 평균 여섯 명이라고 보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1년 국내 자살 사망자 수는 1만5906명이었다. 자살 1만5906명에 따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한 유가족이 한 해 10만명 가까이 된다는 얘기다. 유가족의 자살 위험도가 일반 사람의 약 4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10만명가량이 자살 고위험군으로 분류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살이라는 용어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유가족들은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털어놓기를 주저한다. 따사모를 담당하고 있는 황은선 나나애나무(자살자 유가족지원센터) 사회복지사는 "자살 유가족들은 가족, 친척, 친구 등 주변사람들도 본인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며 "이 때문에 심적 고통을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누구와 나누기를 주저하고 본인 역시 사회적 고립으로 인해 우울증을 겪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황은선 복지사에 따르면 현재 따사모에 참가하는 사람은 180~190명으로 전체 유가족 중 0.2%에 불과하다.
유가족들의 정기적인 자치모임인 따사모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음지(陰地)에서 홀로 가족 자살 후유증을 앓고 있는 유가족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따사모는 유가족으로 구성된 임원진을 중심으로 유가족 지원센터에서 준비한 강의와 그룹별 모임을 진행한다. 2009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매월 정기모임을 갖는다. 이 외에도 2010년 7월부터 유가족들이 모여 영화ㆍ연극관람, 여행 등을 하는 '희망 피크닉'을 통해 정을 나누고 친목을 도모한다. 두 모임 모두 한국 생명의전화에서 뻗어 나온 사단법인 나나애나무에서 주관한다. 이 모임을 통해 유가족들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한다.
K(59ㆍ여)씨의 경우가 그렇다. K씨는 올 1월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던 딸을 잃었다. 시장을 함께 보던 딸은 "잠깐 어디 다녀온다"고 했다. 그게 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19개월 된 딸을 남겨두고 아파트 20층에서 뛰어 내렸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 한 살이었다. 딸의 자살 이후 사위는 손녀를 데리고 본가로 들어가 버렸다. 딸을 잃은 상실감, 손녀에 대한 그리움, 사위에 대한 섭섭함 등이 한꺼번에 K씨를 덮쳤다. 그때 생명의전화에서 운영하는 자아회복 프로그램을 만났다. 현재 K씨는 이 프로그램과 따사모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치유의 과정을 겪고 있다.
최근 따사모 회원들은 P씨를 위해 조촐한 생일파티를 열었다. P씨는 2009년 자신의 생일에 외아들을 잃었다. 그의 생일이 아들의 기일인 셈이다. 이제껏 그에게 생일은 기념의 날이 아닌 추모의 날이었다. 이런 P씨에게 따사모 회원들이 준비한 생일파티는 '이제 그만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되찾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자살자유가족을 대상으로 자아회복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원정숙 경희대학교 간호과학대학 정신간호학 전공 명예교수는 "암 환자는 암덩어리를 꺼내놓는 것이 치료다. 자살자 유가족들은 죄책감과 상실감 등 정신적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를 언어화시켜서 털어놓는 것이 자기 회복에 이르는 길"이라며 "억압을 마음 속에 눌러두고 상처가 쌓이면 이것이 분노가 되고 우울이 된다. 자살자 유가족들은 유가족 자족모임과 자아회복프로그램을 통해 공동체 속에서 건강한 자기정체성을 키우고 함께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법을 배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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