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5.0]봉사로 시작한 상담사, 지금은 노인문제 해결사..인생 2막 '커튼콜'
퇴직후 15년간 봉사활동하는 이명석 파랑새상담사
52세 대기업 나와 다양한 경험
전문적 봉사하려고 자격증 취득
사회는 늙어가는데..수요 부족
[아시아경제 오현길 기자]6.25전쟁 통에 혈혈단신으로 월남을 했던 김모씨(가명)는 오래 전 남편을 잃고 양자와 함께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말로 쉽게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하면서 한푼 두푼 돈을 모았다. 없는 살림에도 꽤 많은 자산을 일궜다.
믿을 곳이라고는 자식뿐이지만 자꾸만 손을 벌리려 하는 아들에게 전 재산을 넘겨주기에는 허무함뿐이다.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하고 싶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아보기엔 몸이 노쇠했다. 그러다 파랑새상담사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명석씨(76)를 만났다. 혼자서 끙끙 앓던 고민을 이씨에게 털어놓으니 그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씨는 “전 재산을 기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어디에 기부해야 보람 있게 쓰일 수 있을지 쉽게 알 수도 없다”며 “김씨의 고민을 듣고 여러 협회 등에 연락을 취하는 등 수고스러웠지만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소속한 파랑새상담사는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한 경로당을 찾아다니며 노인들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해주는 노인 봉사단체다. 이씨는 은퇴후 약 15년간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씨는 대우그룹의 모태가 되는 대우실업을 다니다가 52세에 퇴직했다. 환갑도 되지 않는 나이에 직장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아직도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욕과 욕심은 앞섰지만 반겨주는 이는 없었다. 이어 친구와 함께 뜻을 모아 회사를 차려 사업에도 뛰어들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은퇴 후에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도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며 “사회생활을 일부 정리하면서 휴식기간을 가졌지만 내 능력을 낭비하기 싫었다”고 봉사활동을 시작한 계기를 설명했다.
처음에는 단순 봉사활동으로 시작했다가 차차 전문적인 분야로 폭을 넓혀갔다. 노인심리상담사를 하기 전엔 한 민간 봉사단체 단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2년간 생태계 해설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노인들은 존경을 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부당한 인식을 받고 있다”며 “소외된 그들을 돌봐주고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 일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인심리상담사를 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도 상담사 공부를 빼먹지 않았다. 5개월간 교육을 받고 전문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현재 파랑새상담사에는 그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은퇴를 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특히 노인 대상의 전문적인 심리상담을 하기 위해 일정한 수준의 지적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아무나 참여할 수 없다. 그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상담사 대부분이 교사나 경찰관, 공무원, 기업체 경영자 등으로 학식과 지식, 경륜이 풍부하다.
이들은 많은 사회경험을 토대로 노인들의 다양한 고민들을 함께 나누면서 해결책을 찾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는 신림동과 봉천동을 중심으로 상담활동을 펼치고 있다.
처음 경로당으로 상담활동을 나갔을 때는 '상담은 환자들이나 받는 것'으로 치부되면서 외면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차차 마음을 열면서 이제는 서로 비밀얘기까지 서슴없이 나누는 사이가 됐다.
“건망증이 심하다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니 건망증이 아니라 치매였다. 그래서 자식들을 설득시켜서 인근 보건소에서 치매 치료를 받게 해드렸다. 초기에 치유할 수 있는 치매를 방치할 뻔 했다. 치매와 건망증을 구분하는 방법을 상담 교육을 받으면서 배웠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노인들을 만나면서 봉사활동은 그에게 새로운 여가활동이 됐다. 너무 많은 고민을 듣다 보면 힘에 부치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가끔 사비를 털어야 할 때도 있지만 매일 아침 열정이 샘솟았다.
노인심리상담은 관악구가 지난 2011년부터 노인일자리 신규 사업으로 추진해오고 있는 사업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그는 “한 달 인건비로 20만원을 받고 있지만 돈 보다는 봉사정신과 책임감이 더 크다”며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사명감이 생기면서 오히려 더 부지런해진 삶을 살게 됐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고령화 사회가 가속화되면서 노인학대나 우울증, 자살문제 등이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노인층은 사각지대에 놓여 무관심한 상황에서 친근하게 벗이 돼주는 상담사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고 강조했다.
“노인들이 가장 많이 어려워하는 것은 가족문제나 돈에 관련된 일들이 많아 친구에게도 쉽게 꺼내놓지 못하는 부분”이라며 “도움을 드리기가 쉽지 않지만 서로 간에 신뢰를 쌓아 도움을 드릴 때 뿌듯한 만족감을 느낀다”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도 4남1녀의 자녀들이 있다. 자녀들은 그의 봉사활동의 적극적인 지지자다. “부모가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것에 반대할 자녀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며 “건강한 노년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방광근 대한노인회관악구지회 담당자는 “이 상담사는 직접 팀장으로 한 팀을 이끌고 경로당을 찾아다니며 상담을 해주고 있다”며 “답답하고 우울해 의기소침하셨던 경로당 어르신들이 속이 후련하게 풀리셨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정도”라고 말했다.
현재 관악구 외에도 영등포구 등에서 노인심리상담사를 노인일자리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이 사업은 종료될 예정이다. 그는 “내년에도 이 심리상담 사업을 계속 진행할지 알 수 없지만 그 동안 도움을 나눴던 사람들이 계속 생각나 기회가 허락한다면 상담사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