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장의 집무실에는 서예가이기도 했던 호암이 직접 쓴 '경청(傾聽)'이라는 휘호가 걸려있다. 호암은 셋째 아들인 이 회장에게 삼성을 물려주며 평생의 필력을 다해 두 글자를 썼고, 이 회장은 다시 자신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에게 이 지혜를 물려주고 있다.
이 회장의 경청은 충분히 검토한 뒤 실행할때는 과감하고 신속하게 한다는 '숙려단행(熟慮斷行)'으로 이어진다.
1982년 반도체 사업 진출시 경영진들은 '가능성은 있지만 위험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오랜 시간 숙려한 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2류로 남을 것이라는 판단과 경영진들의 능력을 믿고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했다.
전문경영인의 말을 잘 듣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손대지 못하는 영역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오너의 역할이다. 미래에 먼저 투자하고 현재의 손해에 흔들림 없이 초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건희식 경영'의 요체인 셈이다.
삼성은 세계적인 경영 석학들이 연구해온 유럽의 가족경영, 일본의 가문경영, 미국의 이사회 구조 등 어느 기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전문경영인이 본인의 전문적인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고 오너는 전문경영인이 할 수 없는 결정을 한다. 보다 먼 미래를 고민하고 장기적인 경영안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이 회장의 삼성에 세계 유수의 경제석학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국제금융학자로 '미스터 엔'이라 불리는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와세다대 교수는 본인의 저서 '일본의 몰락'에서 "이건희 회장의 경영 리더십이 삼성전자 DNA의 열쇠"라고 평한 바 있다.
지난 25년 동안 이 회장은 경청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지금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출근해 다양한 계층의 삼성그룹 임직원들과 점심을 함께 하며 경청을 일과로 삼고 있다.
매번 해외 출장길에 올라 글로벌 유력 인사와 만남을 가진 뒤는 일본으로 향해 숙려의 시간을 가진다. 귀국한 뒤에는 경청하고 숙려한 결과를 단행한다.
명진규 기자 a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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