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조치를 취하면서 식약청은 "인체에 해로운 정도는 아니다"는 단서를 달았다. 해롭지 않음에도 회수하라는 모순된 결정에는 식품(혹은 의약품)과 안전 사이 힘겨운 가치판단의 딜레마가 있다.
사실 이런 혼란은 처음이 아니다. 2006년 '약효조작 복제약' 사건을 기억하는가. 실험 수치를 조작해 허가를 받은 복제약들이 무더기로 퇴출됐다. 똑같은 질문이 나왔다. "지금까지 이 약을 먹은 사람은 가짜약을 먹은 건가요." 식약청은 대답했다. "약효가 없는 건 아니지만 회수하기로 했습니다." 2009년 탈크 파동 때도 비슷한 질문과 답이 오갔다.
상식적으로 접근해보자. 소비자는 "평생 먹어도 상관없는 양의 발암물질이라면 감수하겠다"고 생각하며 너구리를 끓이지 않는다. 양이 아무리 적어도 안 먹는 것보단 못하고 세상에 라면은 너구리 말고도 많다. 너구리에는 그 양이 얼마든 '발암물질'은 없어야 정상이다.
식약청이 매번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건 실망스럽다. 이슈가 터지자 "해로운 수준이 아니다"며 자기방어부터 나서는 건 '과학과 원칙'에 매몰된 공급자 위주의 판단 때문이다. 식약청 전문가들은 과학과 증거가 핵심인 실증적 영역에서 일하지만, 사실 그들 고유의 사명은 '안전'이라는 매우 가치적이며 규범적 영역에 있다.
그래서 라면스프 원료에서 발암물질을 확인한 순간, 담당직원과 국장, 청장의 머리속엔 '너구리를 먹는 소비자'가 떠올랐어야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의 폭이 벤조피렌 기준과 외국의 사례, 행정처분 요건 정도에 멈춰서는 게 우리 식약청의 현실이다.
식약청이 국민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건 전문가로서 자존심을 걸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괜찮은데…"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렇게 바라신다면 회수하지요 뭐"라는 식의 대응은 청장이 바뀌었어도 어찌 그리 똑같은지 신기할 따름이다.
신범수 기자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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