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의 역발상]'법적 사고(Legal Mind)'는 위대하다!
요즘 플랜트사업이 주목받는다. 올해 600억달러 이상의 해외건설 수주를 했으며 이중 플랜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어서다.
그런데 플랜트와 관련해 부속계약서(Field Service Regulations)라는 것이 있다. EPC(설계·구매·시공) 건설업체에 기계장치 시스템 등을 공급하는 회사(서플라이어)가 보낸 엔지니어와 관련된 얘기다.
시스템을 장착하거나 최적화를 해주기 위해 구매자의 감독하에 약간의 일당을 받고 일을 해줄 때 필요한 간단한 계약서라고 보면 된다. 본문 계약서는 60~70페이지 분량에 달하지만 FSR은 2페이지를 넘지 않는다. 일당은 얼마이며 감독자의 지시에 따르겠다는 수준이다. 서로간 통지 방식이나 부상 때의 처리방법 등이 언급된다. 서플라이어 인력이 부상당하면 서플라이어측이, 감독자측이 부상을 당하면 감독자측이 책임지겠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선진'이라는 별칭이 붙는 외국 업체들의 이 FSR에 대한 자세는 그리 달가운 경험으로 남아있지 않다. 난 외국 서플라이업체에 고용된 후 처음에는 FSR이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국내 EPC업체와 FSR을 맺으며 구매자측 변호사라면 감독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발생한 손해는 전액 제한없이 배상하라고 문구를 넣었을 것이다. 이것은 특수계약(supervision contract)이었다. 감독자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계약위반을 떠나 바로 부주의 과실이다.
우리나라 EPC 업체들은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서플라이어의 기분을 건드리는 조항을 일부러 넣지 않았다. 속좁은 변호사였다면 넣고야 말았을 조항에 대해 EPC 업체들은 불법행위법이 당연히 개입하려니 보았던 것이다. 협상력 우위(bargaining power)가 있는 '갑'의 입장을 내세우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 EPC 업체들의 상당히 높게 평가한다.
그런데 문제는 외국 본사의 여성 디렉터가 문제였다. 그녀의 법적 사고(Legal Mind)는 풍부한 상상력의 결과였을까. "구매회사와 우리 회사가 A, B라면 지나가던 C사 관계자가 다쳤거나 심지어 사망했을 때 다 배상해줄 것인가"하고 물었다. 속히 사건당 배상책정 한도(fixed sum per incident)를 명시해 조항으로 넣으라는 것이었다.
이에대한 공개적이고 신속한 대답은 외국 본사를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럴 수 없다. 그런 조항은 미래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공모이기에 협상 자체가 불공정한 것이다." 이 내용이 담긴 이메일 한통으로 나는 그 회사의 직책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공개된 셈이었다. .
이메일에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상해자가 제 3자라면 갑-을 관계에서 체결하는 계약에서 책임의 한계가 있지 않은가요? 3자는 A와 계약이 있어 그 장소에서 일하는 것일일뿐 서플라이어하고는 아무런 계약이 없다는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굳이 A,B사간 계약에서 제3자의 피해보상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하느냐고 따진 것이다. 법리에 대한 기본적 개념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디렉터들의 비위는 100% 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었다
사실, 구매자 입장에서는 지시를 따르지 않아 발생한 행위에 대해 얼마까지만 책임을 지겠다는 부분을 받아들이기 만무하다. 또 이런 협상을 제안할 경우 나 자신의 법적 사고 수준이 단번에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무늬만 선진업체'인 우격다짐식 서플라이어에 채용된, '리걸 마인드'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법무담당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외국계 회사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하게 만든 이유였다.
법학교육과 실무를 20년 가까이 접해본 내게 '리걸 마인드'는 너무 중요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리걸 마인드'가 위대하다는 생각까지는 해본 일이 없었다. 한국 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시니컬한 교수님께서 "여러분 리걸 마인드는 사법고시를 향한 집념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신 것, 그것이 나에게 리걸 마인드를 배우기 위해 영어와 판례를 수없이 뒤적이게 만든 계기였다. 외국계 회사에서의 이런 경험은 새삼 '리걸 마인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했다.
불법행위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지 않은 사람들이 법률 조직에 포진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 에피소드 중 하나다. 어쨋든 이 사건은 이 회사에서의 근무기간을 단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메일을 공개적으로 받은 외국회사 본사 법률전문가들은 높으신 분들을 찾아가 한국지사의 법률전문가의 오만방자함을 호소했다니, '리걸 마인드' 없는 전문가의 신념이 자못 심각한 수준이라고 보인다.
법률에서는 불법행위가 우리 측에서 이루어졌을 경우 이는 법원의 판정에 따라 과실의 크기만큼 잘못을 배상하도록 한다. 얼마 이상은 배상하지 않겠다는 것이 통하지 않다는 것을 외국 본사의 '전문가'는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시키기에도 버거웠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월 150만원 견디느니, 美 가서 5억 벌죠" 서울대...
나는 그 일을 겪은 날 밤 CEO와 멘토에게 나란히 편지를 썼다. "'리걸 마인드(Legal Mind)'야 말로 인간의 자기보호 본능을 극복하고 암흑과 같은 불확실성(uncertainty)를 헤쳐나가는 선구자(pioneer)에게 꼭 필요한 등대나 횃불과 같은 것"이라고. 또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각자의 편을 보호하려다 한 발짝도 못나가고 인류의 발전은 끝내 도래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게 됐다"고. "리걸 마인드가 고시에 대한 집념이 아니고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결국 배우고야 말았다"고 말이다.
힐러리 앤드 톰슨 파트너스 대표(hjthomp@hotmail.com)
*김희정 씨는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년간 인턴생활을 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L그룹에 이어 외국계 기업의 법률 전문가로 활동해오다, 얼마 전 '힐러리 앤트 톰슨 파트너스'를 설립하며 독립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