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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여자들의 만만치 않은 꿈, 하이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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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선아 패션컨설턴트]키가 큰 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크다가 고등학교 즈음해서 멈췄다. 어릴 땐 키가 큰 게 얼마나 싫었던지, 항상 낮은 굽만 신고 자세도 안 좋게 하고 다녔던 기억. 심지어 잠잘 때는 일부러 책상과 벽 틈에 꼭 껴서 잤을 정도다.
더 크기 싫어서. 크고나서 생각하니 왜그렇게 안쓰러운 기억인지. 왠만한 남자아이들보다 항상 더 컸으니 나름 스트레스도 받았던 것 같다. 남자보다 내가 더 큰 건 지금도 참 싫다. 정확히 말하는데, 키작은 남자가 싫은 게 아니라 '남자보다 내가 더 덩치가 커보이는 상황'이 싫은 것. 보호받고 싶은 건 여자의 본능이니까.

그러다 어른이 된 후로는, 평균보다 조금 큰 키를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타고난 것에 불만을 품는 건 어른들의 생각답지 않다. 내 키에 대한 애정이 한껏 되살아난 건 얼마 전 정말 즐겁게 본 영화 '줄리 앤 줄리아'를 통해서였다.

영화 속에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사랑스러운 아줌마 요리사 줄리아가 나오는 데 더 작은 키의 남편과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더라. 예전같아선 편견이였다면 편견인 커플의 조건인데, 키의 차이를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한껏 잘 어울리는 모습이 인상적.
줄리아보다 더 큰 여동생에게 파티에서 훨씬 더 큰 남자를 소개시켜주려는 장면도 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여동생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 후였다. 다음 장면은? 언니 부부와 이제 맛 결혼식을 끝낸 여동생 부부가 너무도 행복하게 춤을 즐긴다. 일상의 소중함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때의 즐거움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수작이다.

생긴 대로 사는 게 최고다 생각이 들자마자부터는 머뭇거렸던 하이힐을 신기 시작했다. 10센티가 넘는 굽도 OK. 하이힐이 주는 환상적인 프로포션은 물론 덤이다. 하이힐을 즐겨 신으면서도 내 취향이 반영되는 게, 통굽이여야 한다.

굽이 가늘어질수록 발가락과 발바닥 앞쪽에 하중이 쏠리는 데, 습관으로 단련시킨 덕분에 아픈 강도의 차이일 뿐 보통의 여자들은 그 고통을 그냥 참는 거라고 한다. 내가 처음 하이힐에 도전한 건 스물 세 살 때던가. 굉장히 근사한 초컬릿 컬러의 모던한 각의 굽이 매력인 질샌더가 그 영예로운 첫 하이힐이었다.

잘 걷고 싶었지만 뒤뚱뒤뚱. (키 큰 아가씨가 그러는 모습을 누군가 뒤에서 봤다면 영락없이 '아둥바둥'이였을 터) 심지어 고통을 호소하며 10미터 정도 전진하다 중도에 멈춰서서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함께 있던 친구(남자인)는 여자들에게 가졌던 소중한 환상을 네가 다 깼다며 노발대발. "걔넨 독해서 잘 참는거야~!" 슬리퍼로 갈아신는 와중에도 당당함은 갈아타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흘러 작년이었나. 갤러리아 백화점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족히 15센티는 될 법한 스틸레토 힐(앞코가 뾰족하고, 높고 굉장히 가느다란 굽의 하이힐, 미국권에서는 스파이크 힐(spike heel)이라고도 부른다)을 신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게 됐다. 콘크리트도 뚫어버릴 정도로 날카롭게 가느다란 하이힐의 굽.

시선을 위로 올리니 누구 하나 건드리는 사람도 없고 바람도 고요한데 혼자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의 가느다란 종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그런 스틸레토 힐은 절대 못 신겠더라. 확실히 안정된 둘레의 통굽은 굽의 높이가 아무리 높아져도 발뒷꿈치까지 어느 정도의 하중 안배가 가능하다. 통굽이 미련해보인다고? 통굽도 통굽나름이다.

앞코(Toe)가 동그스름하면서도 각이 느껴지는 형태. 마냥 뭉툭한 라스트는 유치하고 날렵한 라스트는 왠지 진부하게 느껴져서.(2010 F/W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컬렉션의 모델들이 신고 나왔던 리본 코사지를 큼직하게 단 뾰족한 앞코의 로우힐이 아주 근사했다! 역시 취향은 살살 바뀌기도 하는 법) 적정하게 동그스름한 라인으로 이어지다 절묘한 각이 느껴지는 그런 앞코!

굽과 앞코가 딱 맘에 드는 조건을 가진 메리제인 슈즈를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겨우 만났다. 때마침 세일 중이라 그 기쁨은 한층 증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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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성들의 꿈이라는 메리제인 슈즈. 글로시한 블랙의 세련됨은 메리제인 슈즈 특유의 자칫 덜 성숙돼 보일 걱정을 일찌감치 거둬 주었다. 크림화이트의 배색 파이핑 처리는 경쾌함을 추가시켜줬다. 높다. 그러나 한 눈에도 의젓함이 엿보이는 통굽이니 걱정도 덜었다.

그 의젓함에 너무 기댄 나머지 파티에서 새벽까지 이 구두를 신고 춤을 추다가 기어서 들어갈 뻔한 적도 있다. 불신도 문제지만 과신하는 것도 문제다.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 주변에서 나가는 삼재라고 오만가지 겁은 다 주었던 작년 말, 계단에서 굴러서 발목을 심하게 다쳤다.

그 언젠가 보았던 그녀처럼 누구하나 건드리는 사람도 없고 바람일랑 전무했으며 심지어 그녀만큼 가느다랗지도 못한 내 다리였다. 한동안 반깁스를 하고 물리치료를 받아서 곧잘 걷게 되긴 했지만 요즘도 비 오기 전날은 조금 시큰거린다. 그래도 하이힐은 신고 싶어서 이렇게 집에서 몇 분 신는 걸로 만족하고 있다. 눈앞에 두고도 맘껏 신지 못하니 과연 여성들의 '꿈'이 괜히 '꿈'은 아니구나 싶다.



김선아 패션컨설턴트(www.superfashionsuper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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