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1985년 인천 석남초등학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로 운동장은 북적였다. 운동화로 제각각 차지한 영역에 선을 긋는 소년들. 날리는 먼지 아래로 이내 그들만의 야구장이 탄생했다. 경기는 바로 열리지 않았다. 모두 누군가를 기다렸다. 잠시 뒤 유유히 모습을 드러낸 소년이었다. 풍채만 보면 선수 같았다. 번쩍이는 MBC 청룡 유니폼. 두 손에는 배트와 글러브가 가득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다가가 그를 반겼다. 10살 서재혁.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학교를 주름잡는 노하우를.
서재혁은 학급반장이었다. 야구 장비를 소유한 덕에 많은 친구를 거느렸다. 운동기구는 아버지가 건넨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잦은 이사를 겪어야 했다. 짐을 옮길 때마다 아버지는 아들의 친화력을 걱정했다. 소통수단을 구해주고 싶었다. 장고 끝에 떠오른 건 야구. 막 출범한 프로야구 인기로 아이들의 관심을 얻기 충분할 것 같았다. 바로 미군부대 면세점에서 장비를 구매했다. 10여개의 다양한 글러브와 배트. 비싼 가격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 바르게 자라기만 학수고대했다.
야구로 얻은 자신감에 학교생활은 탄탄대로였다. 학업 성적도 뛰어났다. 늘 학급 내 1, 2등을 다퉜다. 무결점 모범생. 그러나 그 범위는 학교 담장 안까지였다. 우물 밖 생활은 정반대였다. 어머니의 권유로 가게 된 교회가 그러했다. 그는 왕따였다. 친구들에게 말 한마디조차 건네기 어려워했다.
“다른 세계에 온 듯 했다. 부유하고 잘난 친구들이 즐비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뒤로 혼자 놀게 됐다.”
어머니의 예상은 적중했다. 교회를 찾는 발걸음은 잦아졌다. 충분히 흥밋거리가 된 기타. 애정은 야구 이상이었다. 매일 저녁 스스로 연습을 강행할 정도였다. 일취월장하는 실력. 어느새 서재혁은 교회 밴드에서 기타를 전담하게 됐다. 속속 주변으로 모여드는 친구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학교에서와 같이 스타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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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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