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원의 여의도프리즘] # 80년 ‘광주항쟁’이 서울지역 대학가에 준 충격은 가히 중세의 ‘지동설’ 만큼이나 엄청난 것이었다.
70년대 광화문에서 벌어지곤 했던 유신반대 시위 당시, 멀찌감치 몸을 사리던 바로 그 소시민들. 그들이 스스로 총을 거머쥐고 다른 곳도 아닌 대한민국 대도시에서 전면적 ‘무장투쟁’의 깃발을 올렸다고?
재야와 대학가가 ‘산자여 따르라’던 망월동의 절규를 가슴에 안고, 전두환 군사정권과의 최후 일전을 위해 대오를 정비하던 84년.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선 이른바 ‘프락치사건’이 발생한다.
학생들이 ‘가짜 대학생’으로 의심받던 4명을 붙잡아 감금.폭행한 사건이다.
수개월 전 정권의 유화책으로 학내 경찰력은 철수했으나, 학생으로 위장한 정보원들이 강의를 듣고 심지어 운동권 서클에까지 은밀히 가입 정보를 빼내던 시절 벌어진 불행한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이던 유시민은 정부의 복교조치 이후 한 달만에 다시 수감, 제적되는 아픔을 겪고 윤호중 백태웅 등도 함께 처벌 받는다.
# 85년은 꾸준히 역량을 축적한 학생운동이 미국 문화원 점거농성 등으로 폭발한 시기였다. 그 해 경찰의 철통같은 봉쇄망을 뚫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집회장에 나타났던 이가 서울대 총학생회장 겸 ‘전학련’ 의장 김민석이었다.
서울지역 대학가 집회현장에 ‘곧 김민석이 출현한다’는 메가폰 멘트가 나오면 도서관의 학구파들까지 몰려들었고 운동권 최초(?)로 ‘오빠부대’가 등장할 정도였다. 여학우의 옷을 빌려 입고 짙은 화장에 하이힐까지 신은 수배자. 그를 알아 볼 정보과 형사는 거의 없었다.
90년대, DJ의 ‘젊은피 수혈’ 대상으로 낙점돼 화려하게 정치권에 들어온 김민석은 문자 그대로 민주당의 ‘황태자’였다.
한편 TV토론 사회자로 대중적 명성을 쌓아가던 유시민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화제의 책을 한 권 세상에 내놓는다. 우리 지역구도 하에서 DJ로는 도저히 승리할 수 없으니, 제3의 후보를 내세우자는 논리로 사실상 ‘조 순 대안론’이었다.
천하의 논객 유시민이 단지 자신의 경제학과 스승이라는 이유만으로 조 순을 DJ의 ‘대체재’로 내세우진 않았을 것이나, 일생일대의 마지막 도전을 하던 DJ와 그 추종자들에겐 아직도 잔상이 남아있는 쓰라린 일격이었다.
이 때 이명박 후보와의 서울시장 선거에서 분패했던 김민석은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수행 중이었다.
다시 2002년 대선. 노무현과 정몽준은 운명을 건 단일화 협상을 벌인다. 유시민은 개혁당을 창당 열광적 노무현 지지운동을 펼쳤고, 김민석은 단일화 촉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정몽준 캠프에 전격 가담한다.
민주당내 친노 세력은 김민‘새’를 조롱했고, 후단협 등 비노 측은 그를 이해하려 애썼으나 그때 시작된 김민석의 정치적 수난은 현재에 이른다.
# 2010년 3월 25일, 유시민은 참여당의 옷을 입고 경기지사 출마를 선언했다. 친노 정치인 상당수가 몸담고 있는 민주당. 그 민주당으론 ‘노무현 정신’ 구현이 어렵다는 게 참여당의 창당 명분 중 하나였다.
같은 날, 김민석은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는 “어려운 곳, 그러나 꼭 가야만 한다면 가는 게 진짜 노무현 정신”이라며 유시민과 참여당을 겨냥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 2007년 5월 이른바 ‘무등산 발언’을 통해 “나는 ‘우국지사’가 아니라 ‘정치인’”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우국지사는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대의’(열린우리당 존속)를 지키지만 정치인은 ‘대세’(민주당과의 통합)를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노짱’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는 유시민 전 의원. 그는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대의’와 야권후보 단일화라는 ‘대세’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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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남일보 국장대우 dwkim@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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