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일본은 침몰하는 경제를 살리려고 공격적으로 유동성을 풀어냈다. 이른바 양적완화를 실시했던 것.


펌프질을 하듯 엔화를 시장에 공급했고, 정치인들은 신경질적이라 할 정도로 은행에 극심한 대출 압박을 가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신용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은행이 우량 중소기업에 일정 금액 이상 자금을 제공하도록 하는 쿼터까지 설정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일본 은행들은 한 편의 코미디와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간신히 '할당량'을 맞추는 선에서 유동성을 제공했고, 그 마저도 도요타의 계열사에 집중됐던 것. 정치권의 대출 압박에 일본 은행들은 제재를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꼼수'를 부렸으니 정부가 원하는 만큼 시중으로 자금이 흘러갈 리가 없었다.


'History repeats itself.'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2009년 미국과 유럽의 모습은 당시 일본와 너무도 흡사하다.

지난 6개월동안 미국과 유럽은 가히 천문학적인 자금을 금융권에 쏟았고, 이어 은행에 대출 압박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지난주 알리스테어 달링 영국 재무장관은 대출을 늘리지 않는 은행을 엄단할 것이라는 협박에 가까운 압력을 가했다.


영국의 영란은행(BOE)은 6일(현지시간) 채권 매입 규모를 늘리기로 해 시장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이처럼 미국과 유럽 정부와 중앙은행은 강한 압력으로 펌프질을 하지만 수도관에 문제가 생겨 유동성이 역류하는 형국이다. 은행으로 공급된 유동성이 중앙은행의 예비금으로 되돌아오거나 국채 시장으로 흘러들어간다는 얘기.


아주 일부 자금이 기업으로 공급되지만 10년 전 일본의 도요타와 같은 우량 기업들로 한정된다. 정작 목이 마른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은 어딘가에서 파이프가 끊어져 '돈줄'이 말랐다고 아우성이다. 가계 역시 대출이 막히거나 자금 조달 비용이 점점 높아지는 상황이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시행한 모기지 완화정책의 수혜를 입은 가계가 9%에 불과한 것이 단적인 예다.


시중 유동성의 역류는 또 다른 역효과를 야기한다. 잉여 유동성을 생산적인 곳에 활용하려는 은행은 거의 없다. 대출이든 투자든 정부나 주주가 위험하다고 여기는 일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번 주 뉴욕에서 열렸던 주식시장 애널리스트의 모임에서는 월가의 은행들이 국채 시장에서의 공매도조차 꺼린다는 개탄이 나왔다.


이렇게 은행이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사이 다른 곳에서 광란이 일어났다. 지난달 도이치 포스트뱅크가 10억 유로 규모의 채권을 발행했을 때 이를 매입하려고 투자자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투자자들은 금융채를 지구촌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여긴다는 것이 월가 애널리스트의 얘기다.


우주항공 업체 EADS가 회사채를 발행했을 때도 같은 진풍경을 연출했다. 통상 8월이 회사채 시장의 비수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도이치 포스트뱅크보다 더 놀라운 일이다. 월가 뱅커들 사이에는 채권시장이 '버블'이라는 경고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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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류 현상을 반드시 나쁘게 볼 것은 아니다. 국채 수익률이 낮게 유지되기만 하면, 그리고 EADS와 같은 기업이 자금을 원활하게 조달해 경기 회복을 이끌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정부에서 은행으로 연결된 유동성 파이프에 생긴 문제를 장기간 방치할수록 정부는 더 강하게 펌프질을 해야 하고, 역효과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회사채 시장은 물론이고 자산시장의 불건전한 영역으로 '광란'이 번져나갈 수도 있다. 유동성의 역류가, 일본과 같은 전철을 밟는 미국이나 유럽이 걱정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황숙혜 기자 snow@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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