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권대우 아시아경제 대표이사 회장


“큰 형님은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 조절해서 무병장수를 하게 해줍니다. 둘째 형님은 병의 조짐이 보이면 미리 대처해서 큰 병으로 발전하지 않게 합니다. 저는 그런 능력이 없기에 큰 병에 걸린 뒤에서야 비로소 치료에 나섭니다. 그래서 세인(世人)들은 저를 대단하게 여기지만 형님들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지요.”

중국의 명의(名醫) 화타가 신통한 의술을 낮추기 위해 한 얘기인데, 이 글을 접할 때 마다 CEO의 역할에 대해 되묻곤 한다.

CEO란 무엇인가.

조직을 늘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의사와 별반 다르지 않을 터다. 그런데 문제는 ‘화타의 형’들처럼 미리미리 관리·단속해야 지속가능한 경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단 병에 걸린 기업은 치명적인 손실은 물론이고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회생이 가능하다.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은 ‘죽어가는 기업’을 되살린 ‘CEO화타’이다. 그는 1998년 소위 잘나가던 재정경제부(현 기회재정부) 관료를 박차고 나왔다.

대신 파산으로 치닫던 코리안리(당시 대한재보험) 대표이사 자리를 떠맡은 이후 조직을 발칵 뒤집는 혁신을 단행, 아시아1위·세계11위의 초우량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사망선고를 받은 기업을 기사회생시킨 ‘CEO화타’의 신통방통한 재주가 궁금했다.

박종원 사장을 만나기로 한 곳은 최근 1차 복원을 마무리 짓고 새로 개방된 경복궁의 후원에서다.

박 사장은 매년 겨울이면 눈꽃이 소담히 핀 궁궐에서 기꺼이 신입사원들의 사진사 노릇을 해준다고 한다. 처음 어색하고 불편해하던 신입사원도 박 사장의 능숙한 ‘김치’ 외침에 이내 멋진 포즈로 화답한다.

경영자와 사원간의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불행히도 이번 겨울엔 눈다운 눈이 내리지 못해 ‘연례행사’를 열지 못한 아쉬움도 달랠 겸 박 사장이 먼저 앞장섰다.

▲ 누구에게나 숨어있는 재능은 있기 마련입니다. 역사학자 캐롤라인 알렉산더는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상황에 따라 영웅적 자질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직원들의 잠재 능력을 뽑아내는 것이 경영자의 덕목이 아닐까요.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뽑아내기 위해선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하빈다. 직원들과 공유하고 교감하기 위해선 얼굴을 트고 친하게 되는 접점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경복궁에서 사진촬영도 그렇고, 신입사원을 뽑을 때 전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죠.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 합니다. 직원들 개개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흉금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에서죠.”

솔직히 ‘경영자의 인재 사랑’은 만고불변의 원칙이지만 박 사장의 인재사랑은 별종에 가깝다. 사장실의 책상위엔 신입사원 전원이 담긴 사진과 프로필이 코팅된 채 붙어 있다. 틈이 나는 대로 외우고 또 외운다. 200명이 넘은 임직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데는 관심과 노력이외 따로 요령이 필요 없다는 얘기다.

▲ 스킨십 경영이라든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의 중요성을 모르는 경영자는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경영현장에서 막상 접목시키긴 녹록치 않은 것도 현실입니다.

“우선 사랑이 밑받침 돼야 합니다. ‘민들레 영토 희망스토리’라는 책을 보면 직원, 고객에 대한 CEO의 마음도 ‘어머니의 사랑’과 같이 따뜻하고 지극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Give&Take’가 아닌 ‘Give&Give’ 즉, 어머니처럼 끝없이 주기만 하는 마더(mother) 경영을 펼쳐 직원들은 물론 더 나아가 고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아야죠.

▲ 그렇다고 무턱대고 사랑만 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때론 인력감원, 사업구조조정과 같은 혹독한 채찍도 필요할 때가 있지 않았나요.

“취임하자마자 전체 인원 320여 명 중 3분의 1인 1000여명을 정리했습니다. 구조조정대상에 전직 노조위원장까지 오르자 노조와의 갈등을 우려한 임원들이 반대하고 나섰어요. 정치권으로부터의 외압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명이라도 예외를 두면 원칙이 무너지게 되고, 조직을 통제하는 설득력 역시 잃게 됩니다.”

박 사장이 구조조정의 칼날을 댄 것은 회사전체의 뿌리 깊게 박힌 무기력증을 잘라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부임한 이듬해 초 새해 사업계획을 보고 받던 박 사장은 어이가 없었다. 해상보험부 등 대부분 부서가 경제가 어렵다며 0% 성장을 목표라고 가져온 것이다.

“1년도 안가서 문을 닫아야 할 정도 회사 사정이 엉망인데 현상유지가 목표라니, 어이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공기업으로, 경쟁 없는 시장에 안주하다보니 구석구석에 ‘무사안일’이란 질병이 침투했던 겁니다. 조직의 군살을 덜어내는 외과적 수술외에도 기업문화를 통째로 바꾸는 과감한 체질 개선이 시급했습니다. 나부터 마음이 독하게 먹었죠.”

등산과 축구, 저녁식사로 이어지는 신입사원 야외면접에서부터 과장급 이상 연봉제 도입, 순환근무제 실시, 제로베이스 신상품 개발, 백두대간 종주, 실패사례발표대회 등 기업문화 바꾸기 작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 신입사원들을 시베리아 들판에서 엄마 젖을 갓 땐 새끼 호랑이로 비유한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야성이 꿈틀대는 조직문화로 바꾸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자유분방한 행동, 창의적인 사고, 엉뚱할 정도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회사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말은 꽤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직원들에게 야성(野性)을 잃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혹한의 벌판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근성을 말하죠. 밀림의 사자와 호랑이가 늘 사나운 것이 아닙니다. 필요할 때 야성이 나오는 것처럼 절제된 야성이 개인은 물론 조직을 강하게 만들죠. 변화가 빠르고 경쟁이 치열한 현대의 기업에 꼭 필요한 덕목이라 봅니다.”

▲ ‘박종원’식의 ‘야성 키우기’ 하이라이트는 2004년부터 직원들과 함께 한 백두대간 종주라고 여겨집니다.

“처음엔 '설마 할까'란 반응이 많았습니다. 군대도 아니고 회사에서 그것도 여직원도 많은데, 30Km의 산행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러나 2004년 지리산 31㎞를 시작으로 2005년 덕유산, 2006년 소백산, 2007년 태백산, 2008년 오대산을 넘었습니다. 매년 8월 말 종주에 나서면 2박3일간 30시간 이상 걷게 됩니다. 점심은 간이식량으로 때우고 밤에는 텐트 속에서 칼잠을 자야하는 고생의 연속이죠.”

직원들은 자신들보다 고령인 박 사장이 직접 앞장을 서 등반에 나서기 때문에 불평불만을 털어 놓을 상황도 못됐다. 반면 극기등반이 해를 거듭할수록 ‘할 수 있다’는 정신이 확산됐다. 개인주의가 강했던 신세대 직원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진 것. 한계상황을 겪으면서 은근과 끈기를 배우고, 동료들과 고통을 나누며 협동의 중요성을 체득했다. 각 부서별 직원을 각 조에 골고루 분산 배치한 결과, 부서간 장벽을 허무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강한 조직은 결코 책상에서 회의와 지시로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서 비롯된다는 금언 율을 몸소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 박 사장을 두고 종종 성공한 낙하산 CEO라는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명문대학과 행시, 그리고 순탄한 공무원의 길을 걷다 ‘낙하산’을 타고 금융사CEO가 됐습니다. 11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관료에서 CEO로 인생 이모작의 비결이 궁금합니다.

“여타의 낙하산 인사와 궤를 달리한다고 봅니다. 내가 손들고 나왔습니다. 당시 정부에 몸담기 보다는 기업에 가서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죠. 일단 어떤 일을 결심하면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행동에 옮깁니다. 그러고는 끝장을 볼 때까지 그 일에 매달립니다.”

박 사장의 최대 강점은 투명경영이다. '할 말은 해야 하는' 그의 스타일이 경영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노조 간부를 임원회의에 참석시키고 전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임원회의에 들어가도록 했다. ‘쉬쉬’하는 공기업 문화도 사라졌다.

▲ 박 사장은 공직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기업가로서 ‘실패의 추억’이 없는 사람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만약 실패하면 사례를 철저하게 연구, 분석해서 대비책을 만들라는 것이 비결일까요.

“인생에서 실패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대신 실패를 줄여나가기 위해 실패에서 배우는 ‘실패 재활용’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매년 한 두차례 실패사례 보고대회를 열고, 해당 프로젝트의 실패과정과 원인 등을 분석합니다. 가장 솔직하고 체계적으로 실수 사례를 공개하는 부서에게는 포상을 합니다.”

실패를 혁신의 도구로 삼는 박 사장의 ‘역(逆) 발상 접근법’으로 처음엔 의무적으로 실패사례를 두루뭉술하게 발표하던 직원들도 이젠 투명하고 진솔하게 실패를 공개하는 문화가 생겨났다. 성공 경험보다는 실패 사례를 공유할 수 있을 때 조직은 더 건강해진다는 것이 박 사장의 신념이다.

현재 우리는 경제 불황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이 적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열정을 잃는 것이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워진다는 말이 있다. 박종원 사장은 바로 희망과 열정을 통해 1999년 '비전 2020'을 통해 2010년까지 글로벌 10위 재보험사가 되겠다던 희망을 이뤄냈다.

이제 곧 봄이다. 이른 봄에 꽃망울이 피어나듯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간직한 채 박종원 사장과 코리리안리의 임직원 모두가 활기찬 야생화로 거듭 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정리=이규성 기자 bobo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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