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트
연재기사 209개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해설 및 인문학적 비평. 주제 의식은 물론 신, 장면 등에 담긴 가치를 찾아내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때로는 비판적 시각으로 실현이 가능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사라진 뒤에야 보이는 것들
수치로 환산하고 효율로 재단하는 시대. 삶과 문화도 예외가 아니다. 무형의 가치를 믿는 행위가 종종 무지한 광기나 아집으로 치부된다. 배우 장동윤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누룩'은 이 씁쓸한 현실을 양조장으로 끌고 들어온다. 누룩이 사라졌다며 시름시름 앓는 소녀 다슬(김승윤)을 통해 현대인이 상실한 근원적 신뢰와 신앙의 실체를 추적한다. 진리를 갈구하는 개인과 이를 억압하는 다수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구도에 한국 전
2026.04.29 08:00
천천히 사라지는 것들…'마지막 야구 경기'
야구영화의 문법은 대개 단순하다. 승패가 서사를 끌고 가는 가운데 주인공이 시련을 넘어 성장한다. 미국 독립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는 이 익숙한 틀에서 크게 벗어난다. 승패가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를 책임지는 주인공도 없다. 플롯을 뒤집는 사건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동네 야구장에 모인 중년 남성들이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 풍경만 담긴다. 누가 이기느냐보다, 왜 이 경기를 끝내려 하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배경이 되는
2026.04.22 17:01
"슬퍼했으니 됐다?"…타인의 지옥을 '관람'한 당신의 값싼 면죄부
카메라는 현실의 끔찍한 고통에 어디까지 다가가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증언해야 할까. '힌드의 목소리'는 이 무겁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세계 영화계에 던진 작품이다. 카우타르 벤 하니야 감독은 2024년 1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당시, 빗발치는 총격 속에서 적신월사에 구조를 요청하다 끝내 숨진 여섯 살 팔레스타인 소녀 힌드 라잡의 실화를 다룬다. 영화는 제82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주목
2026.04.21 09:46
두려운 것은 귀신일까, 불신일까
영화 '살목지'는 신뢰가 거세된 시대의 불안을 이야기한다. 충남 예산의 저수지 괴담에 로드뷰라는 현대적 관찰 도구를 덧씌워,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이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있는지 드러낸다. 그 실체는 내 곁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다. 로드뷰 화면에 정체불명의 형체가 찍히고, 재촬영을 위해 살목지로 향하는 한수인(김혜윤) PD와 촬영팀. 폐쇄된 저수지에서 행방이 묘연했던 선배 우교식(김준한)을 만나고, 설명되
2026.04.15 07:51
과거는 형태를 바꿔 돌아온다…노무라 감독 '모래그릇'
'모래그릇'은 단순한 범죄 영화가 아니다. 살인 사건으로 출발하지만, 수사의 끝에서 사회가 무엇을 지우고 성장하는지 묻는다. 이야기는 도쿄의 한 전철역에서 신원 불명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유일한 단서는 피해자가 남긴 마지막 말로 추정되는 '가메다'라는 단어다. 베테랑 형사 이마니시(탄바 데츠로)는 이를 실마리로 일본 전역을 뒤지고, 수사망은 서서히 유명 작곡가 와가 에이료(가토 고)에게 좁혀진다. 사회적으
2026.04.08 08:00
땀방울로 쟁취한 청춘의 발효…'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
영화 '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장이 된 열여덟 살 토톤(클레망 파보)이 일곱 살 여동생을 건사하려고 콩테 치즈 경연대회에 뛰어드는 과정을 그린다. 루이즈 크루보아제 감독은 허세와 장난기라는 가면에 감춰진 10대의 취약성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건조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농촌 노동 계급의 삶을 낭만적인 전원으로 포장하지 않으면서도, 얄팍한 비참함으로 소비하지 않는 윤리적 거리두기를 유지한
2026.03.31 07:00
알고리즘이 건넨 위로, 그 껍질을 깨고 나온 '월간남친'
바야흐로 알고리즘이 개인의 취향을 분석하고 간파하는 시대다. 수많은 플랫폼이 클릭 몇 번이면 입맛에 맞는 정보와 상품을 대령한다. 이 무한한 편리함은 넷플릭스 시리즈 '월간남친'에서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까지 파고든다. 맞춤형 감정과 연애다. 사랑마저 서비스로 구독한다. 제작진은 이 서늘한 상상력을 앞세워 현대인의 결핍을 정조준한다. 상처받고 지친 현실의 피로감과 철저히 나를 위해 설계된 가상 세계의 도파민
2026.03.25 11:00
경기도, 슬레이트 지붕 철거비 지원
경기도가 거주하지 않는 주택의 훼손·방치된 석면 슬레이트 지붕 철거 지원비용도 지원한다. 과거 지붕재로 쓰였던 슬레이트는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 경기도는 그동안 지원이 안 돼 훼손 및 방치된 슬레이트 건축물의 소유주로부터 신청받아 신속하게 슬레이트 철거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23일 밝혔다. 경기도는 집주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일반 가구는 최대 700만원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등 취약
2026.03.23 07:34
대의명분 비웃는 테러범…곪아가는 '무관심'이 진짜 뇌관
나가이 아키라 감독의 영화 '폭탄'은 도쿄 도심에서 벌어지는 연쇄 폭발을 다룬 스릴러다. 그런데 사건의 주요 무대는 시내 한복판이 아닌 비좁은 취조실이다. 가벼운 상해 혐의로 체포된 중년 남성 스즈키(사토 지로)가 돌연 도심 곳곳에 기폭 장치가 설치됐다고 말하면서 심리전이 펼쳐진다. 그는 담당 형사 루이케(야마다 유키)에게 시민의 목숨을 인질 삼아 기괴한 퀴즈를 낸다. 제한 시간 내에 정답을 찾지 못하면 도심 곳곳에
2026.03.22 08:00
천재의 영감보다 위대한 노동의 연대…'프로젝트 헤일메리'
인류는 멸종 위기를 맞는다. 지구가 빙하기에 돌입해서다. 태양 에너지를 갉아먹는 미세 생명체 아스트로파지가 무서운 속도로 번식한다. 생존의 실마리를 찾고자 머나먼 타우 세티 항성계로 편도나 다름없는 우주선이 떠난다.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이 절망적인 자살 임무를 떠밀려 맡은 라일랜드 그레이스(라이언 고슬링)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평범한 중학교 과학 교사인 그는 긴 수면의 부작용 탓
2026.03.17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