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틸렌은 과일이 익도록 돕거나 식물을 세균으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한다. 바나나와 아보카도, 키위, 사과는 스스로 에틸렌을 방출한다. 이들 과일 주위의 에틸렌 농도가 높아지면 숙성이 빠르게 진행된다.

일상생활에서 이 원리를 응용할 수 있다. 오래 두고 먹을 요량으로 단단한 바나나와 아보카도를 많이 들여놓은 뒤 그중 일부를 먼저 먹으려고 한다면, 원하는 만큼을 종이봉투에 담아두면 된다. 방출된 에틸렌이 봉투에 머물면서 이들 과일의 숙성을 촉진한다.


과일 수입·유통업체는 오래전부터 에틸렌을 이런 용도로 활용해왔다. 업체는 운송과 통관에 걸리는 시일을 고려할 때 과일을 덜 익은 상태로 들여와야 한다. 그 다음 에틸렌으로 중간 정도 익힌 과일을 출하한다. 후숙 시설 내에 분사되는 에틸렌은 석유화학 공정에서 생산된다. 에틸렌의 원료로는 주로 원유를 정제해서 얻는 나프타가 쓰인다.

최근 일본에서는 중동 사태로 나프타가 부족해지면서 에틸렌 물량도 줄어들었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이로 인해 바나나와 아보카도, 키위 수입업체들이 출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에서는 나프타 부족의 파장이 이렇게 번지지는 않았다.


에틸렌이 과일 숙성에 상업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석유화학 제품의 쓰임새 중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사례를 든 것은, 석유를 원료로 한 제품이 우리 생활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강조하기 위해서다.

석유화학 소재는 없는 곳이 거의 없다. 무소부재(無所不在), 유비쿼터스하다. 석유화학 산업은 각종 비닐봉투에서 시작해 비닐장갑, 옷, 가방, 신발, 가전제품, 주방용품, 사무용품, 책상, 의자, 병원용품, 인공 장기, 바닥재, 휴대전화, 컴퓨터, 반도체, 디스플레이, 전력 설비, 건설 자재,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불가결한 소재를 제공한다.


불을 밝히는 등유에서 내연기관 연료로, 석유화학 소재로, 석유는 새로운 용도를 찾아왔다.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처럼 문명을 소재로 구분하는 기준을 적용한다면 현대 문명은 석유화학 시대다. 신재생 연료는 많아도 석유를 대체하기 어려운 것처럼, 석유화학 제품을 대체할 후보도 마땅치 않다. 브라질에서는 사탕수수에서 에탄올을 대량 생산하지만, 이 에탄올은 대부분 바이오연료로 쓰이지 에틸렌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바이오연료는 나프타와 비교해 뽑아낼 수 있는 석유화학 제품의 다양성이 크게 떨어지고 공급 규모를 확대하기 어려운 데다 값이 비싸다.


주기율표를 발견한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는 석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인용된다. "이 물질은 태워버리기에는 너무 귀중하다. 우리가 이 물질을 태울 때, 우리는 돈을 불살라버리는 것이다. 이 물질은 화학적 합성에 원재료로 활용돼야 한다."


이 어록에 담긴 메시지는 오늘날 더욱 유효하다. 소재의 원료 중 다양성과 경제성에서 원유에 버금가는 것은 아직까지도 없다. 이참에 탈(脫) 플라스틱을 서두르자는 주장은 취지는 훌륭하나 실용적이지 않다. 중동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되짚어본 뒤 개선해야 할 점은 원유와 나프타의 수입선을 다변화해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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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진 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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