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투자 확대의 기회비용도 따져봐야
기술주권 고려한 국가적 장기 계획 필요
조선업이 미국과의 전략적 관세 협상의 무대 위에서 존재감을 키우며 대한민국 무역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 행정부가 주요 산업 제품에 대한 관세를 두고 동맹국들과 주고받기에 나선 가운데, 조선업은 한국이 쥔 가장 강력한 협상 카드가 됐다. 제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회의 참석을 계기로 방한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 16일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과 김희철 한화오션 대표를 연달아 만나 협력 의지를 밝혔다. 이번 만남은 미국 측 요청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그리어 대표는 APEC 회원국 대표들과 10분 단위로 숨 가쁜 릴레이 회담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 국내 조선업체 대표와의 면담에 2시간을 할애했다.
그 배경에는 K조선의 독보적 기술력과 생산 능력, 그리고 미국이 처한 관련 산업의 구조적 한계가 자리한다. 한국은 고부가가치 선박인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분야에서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 중이다. 특히 대형 조선 3사(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오션)가 세계 최고 수준의 친환경 선박과 자동화 설비 기술은 단순한 경쟁력을 넘어서 하나의 '패권'이 됐다.
반면 미국은 세계 최대의 해양안보·에너지 수송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자국 조선업 기반이 붕괴된 상태다. 해군 함정이나 특수 목적선 등을 제외하면 상업용 선박 대부분을 해외 조선사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내 조선업 생태계를 유지하면서도 해외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일정 부분 흡수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언뜻 K조선 카드는 매우 주효해 보인다. 몸값이 치솟고 투자가 집중되며 2000년대 황금기가 돌아올 것만 같다. 하지만 덮어놓고 낙관하기엔 우려 사항도 적지 않다. 미국이 단순한 시장 개방뿐 아니라 공동 생산이나 기술 협력, 더 나아가 미국 내 조선소에 대한 한국 기업의 투자를 다층적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기술 유출과 가격 경쟁력 저하라는 부작용도 검토해야 한다. 미국과의 협상이 '상호호혜'라는 원칙 아래 이뤄지려면 기술의 공동개발, 친환경 선박 인증 및 인프라 구축 지원 등의 조건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미국 내 투자 확대가 지불할 기회비용이 무엇일지는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1937년 대공황의 상흔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미국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해사위원회의 주도로 '장기조선업프로그램(LRSP)'라는 전략적 결정을 내린 바 있다. 1936년 제정된 해운법을 기반으로 미국은 "미국 선박은 미국 조선소에서 미국 국민에 의해 건조되어야 한다"는 철학적이면서도 구속력 있는 원칙을 명문화했다. 10년 동안 500척 이상의 선박 건조를 구체적으로 내걸고, 민간 조선소에 대한 직접 보조금과 정부 발주로 생산 기반을 넓혔다. 선발 설계 표준화, 인력 양성, 저리 대출도 지원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조선은 1940년대 중반 세계 시장을 장악하며 황금기를 맞게 된다. K조선 재도약을 위한 필요조건은 미국 파트너로서의 존재감이 아니라, 한국식 LRSP를 통한 산업 보호와 기술 주권에 대한 정부의 고려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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