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때로 수업 시간에 어느 ‘어른’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책에도, 뉴스에도 나오지 않는 그 어른은 경남 진주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한 김장하 이사장이었다. 선생님들이 전해준 김 이사장에 관한 이야기는 한결같았다. "김 이사장은 개인 재산을 털어 이 학교를 설립한 뒤 8년 만에 아무런 대가 없이 국가에 기증하신 훌륭하신 분이다.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철부지 시절 그러려니 하고 들었던 김 이사장에 대한 이야기는 머리가 굵어질수록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누고 베푸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시나브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의 삶이 궁금해지곤 했다.
사는 게 참 어이없이 재미있을 때가 있는데, 김 이사장에 대한 궁금증을 지난 7일 영화관에서 해소할 수 있었다. 영화 ‘어른 김장하’의 시사회 자리였다. 김 이사장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오는 15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해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했다. 한약방에서 주경야독하며 19살에 한약방을 개업했다. 직원들에 따르면 김 이사장은 박리다매를 강조했다. 싸게 많은 사람에게 약을 지어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김 이사장은 큰돈을 벌었다. 직원을 20명 가까이 두고 약을 새벽 3시까지 지어야 할 정도로 성업했다.
그렇게 번 돈을 거의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김 이사장은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며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고 했다.
김 이사장은 사재 약 110억원을 들여 설립한 진주 명신고등학교를 1991년 국가에 기증했다. 명신고등학교 설립만이 아니었다. 김 이사장은 진주가정폭력상담소 설립과 지역 신문인 진주신문 창간에도 큰 도움을 줬다. 국립 경상대학교 극회 학생들이 공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이 김 이사장이었다. 명신고를 설립하기 전부터 오랫동안 지역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진주 대아고등학교를 졸업한 문형배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고등학교 3년과 대학교 4년 동안 김장하 장학금을 받았다.
‘어른 김장하’가 극장에서 상영되기까지의 과정은 흥미롭다. 평생 나눔을 실천한 김 이사장의 삶이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의 관심을 끌었고, 김 전 국장은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김 이사장을 몇 년 동안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김 전 국장의 노력은 MBC 경남의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말 2부작으로 방영된 뒤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MBC는 올해 설 연휴에 전국 방송을 했고 호응은 지속됐다. 지난 4월 백상 예술대상에서 TV 부문 교양 작품상을 받았고 영화관 상영에까지 이르렀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세상에서 따뜻한 온기를 전해온 나눔의 삶이 대중의 호응을 얻어 작은 기적을 일군 셈이다. 영화계가 전례 없는 불황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어른 김장하’의 기적이 흥행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박병희 문화스포츠부장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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