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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모의 酒저리]두술도가, 균형 잡힌 삶의 맛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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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경북 문경 '두술도가'①

실리콘밸리 엔지니어 부부, 소박한 시골생활 꿈꾸며 귀국
공동체 쌀 소비 위해 빚던 술, 양조장으로 이어져
‘희양산 막걸리’ 세 가지 술 혼합해 맛의 균형 추구

[구은모의 酒저리]두술도가, 균형 잡힌 삶의 맛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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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다. (…)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1906~1995)에게 미래란 기대나 예측에 의해 적중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양한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지고, 그렇게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 진정한 미래였다. 나의 삶에 우연히 개입해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는 측면에서 그에게 타자란 새로운 삶과 시간을 가능하게 해주는 축복의 대상이었다.

김두수·이재희 부부에게도 미래란 계획대로 반드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펼쳐지고, 그 길로 뻗어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미래였다. 타자와 마주하고 관계하며 펼쳐진 술도가의 길, 그들의 설레는 발걸음이 닿아있는 곳, ‘두술도가’다.


희양산 막걸리의 변천사를 둘러볼 수 있는 양조장 내부.

희양산 막걸리의 변천사를 둘러볼 수 있는 양조장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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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 꿈꾸던 부부, 한국으로 발길 돌리다

둘은 미국에서 처음 만났다. 반도체 엔지니어였던 그들은 한국에서 같은 직장에 적을 두었음에도 서로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각자의 꿈을 품고 건너간 이국땅에서 서로를 마주했고, 그렇게 부부의 연을 맺었다. 부부가 된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우연히 마주한 ‘녹색평론’이란 잡지가 그들의 삶을 흔들었다.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녹색평론은 부부가 이전과는 다른 삶을 꿈꾸게 했다. 시골에서 조용하고 단순하게 사는 삶, 농사를 통해 자급자족에 다가가는 삶.


생각이 한 곳에 가닿자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침 9·11 테러 이후 어수선했던 미국의 분위기도 그들이 다시 한국으로 발을 돌리는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다. 부부는 실리콘밸리의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 그리고 영주권까지 모두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4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부부는 귀농학교를 다니며, 그들을 한국으로 이끌었던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과 교류하며 정착지를 물색했다.

그렇게 1년 가까운 고민 끝에 부부는 경북 문경에 터를 잡았다. 반드시 문경이어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당시만 해도 귀농 인구가 지금만큼 많지 않았던 때이기도 했고, 시골이라고 아무 곳에서나 자리 잡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먼저 내려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살아가는 선배 귀농인들이 있는 곳들 가운데 마음에 들어온 곳이 문경이었다.


부부는 이것저것 안 지어본 농사가 없다고 말했다. 자본도 기술도 넉넉지 않은 부부에게 농사가 마냥 수월한 일일 수는 없었다. 많이 벌기보다는 적게 쓰는 쪽을 택했다지만 과거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수입 역시 쉽게 익숙해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생활도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부부의 집은 전화와 인터넷이 먹통이었고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난방을 해결했다. 자발적인 선택이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불편한 것투성이였다. 하지만 둘은 문경에 뿌리내린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 도시에서의 삶은 더 이상 선택지에 없었다.


두술도가의 발효실 내부.

두술도가의 발효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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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유기농 쌀 판로 모색… 양조장으로 이어지다

부부는 귀농 이후 원주민들로부터 차별받은 기억이 없다. 과거 탄광지역이기도 했던 문경은 외지인의 왕래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터라 그들에 대한 경계나 차별 역시 덜했다. 하지만 십여 명이 전부인 산골마을 주민들과의 교류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런 그들에게 숨통을 트여준 것이 '희양산마을영농조합법인’이다. 조합원들과의 만남은 부부의 농촌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 줬고 무엇보다 두술도가라는 양조장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2017년 설립된 희양산마을영농조합은 가은읍 원북리와 상괴리 등에 터를 잡은 귀농인들과 토박이 주민들이 함께 만든 우렁쌀작목반이 모태로,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한 ‘희양산우렁쌀’을 생산한다. 우렁이 농법으로 재배한 양질의 유기농 쌀이었지만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는 가격, 판로 부족 등으로 조합은 쌀 판매에 애를 먹고 있었다.


판로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조합원들을 지켜보며 김두수 씨는 문득 직접 가공에 나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처음 술을 빚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이 전업 술도가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좋아서 빚은 술’을 모토로 주변 사람들과 나눠 마실 술을 만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혼자 술을 빚기 시작했다. 이책 저책 뒤져가며 공부했고 다양하게 빚어보고 마셔봤다. 경험이 늘어날수록 주변의 평가도 좋아졌다. 김두수 두술도가 대표는 “여러 번 빚다 보니 다음번에는 더 잘 만들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며 “주류라는 게 허가가 필요한 일이다 보니 합법적으로 면허를 취득해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렇게 2018년 탁주 제조 면허를 취득하고, 가은 아자개장터의 빈 건물을 임대해 양조장으로 꾸며 2019년 1월 문을 열었다. 두술도가의 시작이었다. 두술도가라는 이름은 말술이라는 뜻의 ‘말 두(斗)’자에 양조장을 뜻하는 술도가를 더해서 지은 것이면서 동시에 김 대표의 이름인 ‘두수’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두술도가 '희양산 막걸리 15·9'

두술도가 '희양산 막걸리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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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맛·단맛·쓴맛의 밸런스, ‘희양산 막걸리’

희양산 자락에서 빚어낸 두술도가의 술은 자연스레 ‘희양산 막걸리’가 됐다. 두술도가는 도수를 다르게 만든 ‘희양산 막걸리 15’와 ‘희양산 막걸리 9’ 그리고 문경의 특산물 오미자를 넣어 봄·여름에만 선보이는 ‘오! 미자씨’ 등 세 가지 탁주를 만들고 있다. 단출하지만 옹골찬 구성이다. 희양산 막걸리는 희양산우렁쌀과 우리밀 누룩으로 빚은 이양주다. 밑술에 대략 5일 정도 걸리고, 덧술을 해서 3~4주 정도 발효시킨다. 이후 저온 창고에서 9도(%)는 한 달가량, 15도 제품은 석 달 정도 숙성시킨 뒤 병에 넣어 시장에 내보낸다.


희양산 막걸리는 맛의 ‘밸런스’에 중점을 둔 술인데,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방식이 제법 독특하다. 일반적인 상업 양조에서 제조사들은 같은 술을 여러 발효조에 빚은 뒤 블렌딩을 통해 발효조별 맛의 편차를 줄이고 일정한 맛을 구현해 출시한다. 하지만 두술도가는 달지 않은 드라이한 술과 단술, 신술 등 각기 다른 맛이 강조된 세 가지 술을 따로 빚어 3종을 혼합하는 방식으로 의도한 최상의 맛을 만들어낸다.


김 대표는 “한 배치(Batch)에서 만든 술만으로는 원하는 수준의 풍부한 맛을 충분히 내기 어려워 각기 다른 세 가지 술을 블렌딩해 좀 더 다양하고 복합적인 맛과 풍미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특히 신맛과 단맛, 쓴맛의 균형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며 “처음 마셨을 때는 상쾌한 신맛이 느껴지다가 조금 더 머금고 있으면 단맛이 나고, 삼키고 나면 쓴맛이 입 안에 남은 신맛과 단맛을 정리하고 마침표를 찍어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두술도가의 술은 전래동화를 연상하게 하는 인상적인 라벨로도 유명하다. 출시 초 병목 아래 제품명만 단순하게 적혀 판매되던 희양산 막걸리의 변화를 주도한 건 아내 이재희 씨다. 500mL로만 출시되던 제품을 750mL로 키우면서 새로운 라벨이 필요하던 차였는데, 그때 이 씨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희양산 공동체에 속한 전미화 작가의 그림이었다.


이 씨의 협업 제안에 전 작가가 흔쾌히 동의하면서 희양산 막걸리는 지금의 눈에 띄는 외관을 갖추게 됐다. 이 씨는 “재미있는 그림이 너무 많아 한두 가지만 고를 수 없었다”며 “전시회를 콘셉트로 잡고 다양한 그림을 라벨에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술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림으로 술을 기억하는 분들도 꽤 된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전미화 작가의 독특한 그림은 희양산 막걸리의 또 다른 맛으로 녹아들었다.


'희양산 막걸리 9'에 사용된 전미화 작가의 '만세!호랑이'

'희양산 막걸리 9'에 사용된 전미화 작가의 '만세!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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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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