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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 생활]사망원인 불명의 무기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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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30대 중반에 이르는 동안 본격적인 연애가 없던 그녀는 결혼을 포기한 상태였다. 안정된 직장과 집이 생겼지만 늘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자주 다니던 식당 아주머니가 남자를 소개했다. 자영업을 하며 건실한 남자.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멋있었다. 훤칠한 키에 40대 초반으로 보이지 않게 날씬했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동거를 시작했다. 같이 저녁을 먹고 주말에는 놀러 가는 소소한 즐거움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법의학 생활]사망원인 불명의 무기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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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했던 그의 말투가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가게는 폐업하고 매일 술을 마셨다. 돈도 요구했다. 그녀의 얼굴은 어두워져 갔다. 직장 동료들까지 근심을 알 정도가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출근하지 않았다. 성실한 사람이 나오지 않으니 동료들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동거남이었다. 그는 그녀가 일어나지 않아 119에 신고해 대학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혈압은 저하됐고 호흡은 미약했다. 심폐소생술을 통해 자발 순환이 회복되었지만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치료받았다. 의식을 찾지 못한 그녀는 입원 한 달 만에 사망했다.


건강하고 지병이 없던 그녀의 사망은 주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망 원인은 저산소성 허혈성 뇌병증 즉,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어 사망한 것으로 기재됐다. 사망의 종류는 병사. 직장 동료들이 경찰에 신고했다. 뭔가 잘못된 죽음이라는 의심에서였는데 근거가 있었다. 동료들은 그녀에게서 동거남이 자신을 수익자로 생명보험에 가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찰은 거액의 보험금을 확인하고 부검 영장을 발부받았다. 부검대에 올라온 그녀는 몸 전체가 부어있는 상태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멍 등의 손상이 회복될 수 있는 시간이다. 만약 독극물에 의한 사망이라도 검출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에서 손상이나 병적 소견은 없었고 독극물 검사도 모두 음성이었다. 이러한 부검 결과를 내보낼 때는 가장 마음이 답답하다. 그녀가 회복되지 못하고 사망한 지금 혹시라도 있을 범죄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최초 병원에 왔을 때의 상태이지만 우리나라 시스템에서는 이를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경찰에서는 정황상 분명히 의심이 든다며 진짜 아무런 소견이 없는지 물었으나 대답은 ‘불명’ 이외에 달리 없었다. 왜 사망했는지 명확하게 알려줄 수 없을 때 법의학자는 가장 무기력감을 느끼게 한다.

이 사건은 내게 오랫동안 기억된 아픈 손가락 사건 중 하나이다. 모든 정황이 의심스러운데도 시신이 없거나 장기 입원하면서 사망할 경우 모두 법의학자가 제한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부검을 통해 모든 사인을 밝히는 것은 아니다. 부검에서 이상 소견이 없더라도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경우 해결책의 실마리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정부에서 보험금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서 만약 거액의 보험금이 있다면 의무기록이라도 리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미국 법의관 시스템을 고려해 봐도 좋을 것이다. 마지막 화장을 하기 전에 사망진단서를 살필 수 있는 권한을 각 주의 법의관에게 부여해서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의혹을 제거하는 체계는 우리나라에도 필요하다. 최선을 다했으나 사망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최선을 다할 상황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유성호 법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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