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정치적 인간’의 빛과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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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페이스북을 오랫동안 해왔다. 사적인 일상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치 얘기만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개인으로서의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정치 얘기만 하는 사람들은 낯설다. 정치적 주의 주장이 그 사람을 설명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PC주의자’라는 것과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것은 별개의 얘기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한쪽 진영의 철석같은 지지자 혹은 반대자들이다. 유난히 정치에 관심이 많으니 ‘정치적 인간’(호모폴리티쿠스)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일까. 본래 ‘정치적 인간’은 긍정적 의미의 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폴리스를 형성하며 살아가기에 적합한 동물"이라고 했을 때,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정치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었다. 한나 아렌트도 ‘인간의 조건’에서 관조적 삶이 아닌 활동적 삶, 즉 정치적 삶을 강조했다. 정치적인 것의 부활, 정치적 사유와 실천 능력의 복원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정치 고관심층들은 과연 인간다운 삶을 가져다줄 정치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정치철학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정치에만 매몰된 반쪽짜리 인간들을 양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것은 정치 말고도 다른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런데 머릿속에 정치만 들어차면 다른 생각들은 자리할 곳이 없게 된다. 정치적 증오심만 가득한 삶으로는‘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인간적 소양을 갖추는 노력을 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 정치의 모습이 그러하다. 진영의 팬덤들에 둘러싸인 정치는 극단적인 증오의 정치를 낳았다. 공존의 정신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상대를 악마로 만드는 죽기살기식의 싸움만 반복한다. 온갖 허위사실을 꾸며내서 선동을 하다가 사실 아님이 드러나도 누구 하나 제대로 사과하는 법이 없다. 정치인들의 언어와 품격은 사회의 바닥 수준이라 할 만큼 부끄럽다. 지지자들의 입에서는 혐오와 저주의 언어들이 일상화되어 있다. 무엇보다 참담한 것은 그런 당사자들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도 성찰하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들을 가리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정치적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문제는 아렌트가 말했던 ‘정치적인 것의 상실’이 아닌 ‘정치적인 것의 과잉’에 있다.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는 ‘장미의 정원’을 가꾸는 조지 오웰의 면모를 다룬 독특한 책이다. 오웰의 삶은 흔히 전쟁으로 점철되었다는 소리를 듣지만, 그는 언제나 자연에 관심을 갖고 "일상적인 즐거움과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경하했다"는 것이 솔닛의 설명이다. 오웰에게 싸움은 ‘빵’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미’를 얻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단 하나뿐인 이 지상에서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던 오웰은 자기 무덤에 장미를 심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에게는 ‘장미의 정원’을 가꿀 정치인이 과연 있을까. 우리 정치의 불행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품격과 교양을 갖추지 못하여 국민 평균치에도 못 미치는 정치인들이 국민들의 삶을 이끄는 자리에 올라가 있는 현실에 있다. 합리적 이성은 거세되고 증오의 적개심만 넘치는 정치인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광경들을 보노라면, 대체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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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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