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민의 사이언스빌리지] 두 개의 가면
스마트폰 개인화로 알고리즘 인식…IT기업의 사고 제한
본캐·부캐 실제 삶과 온라인 삶 병행
현실세계 불안요소 제거한 메타버스, 제한된 감정 표출·민낯 반영
간섭과 통제 혐오하면서 안전과 편리 택하는 스스로의 모습 재고해야
만년필을 보려고 인터넷 검색과 쇼핑몰을 들어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후 접속하는 대부분 사이트에 만년필과 관련된 문구류 광고가 뜨더군요. 요즘 대부분이 이런 경험을 해 보셨을 겁니다. 과거 IT기업들은 IBM사가 창안한 고객관계관리(CRM)라는 시스템을 마케팅에 활용했습니다. 말 그대로 고객을 휘발성이 아닌 지속적 관리 대상으로 확장한 거죠. 당시는 개인 정보에 대한 중요성이 기업은 물론 사용자조차 예민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지금은 프라이버시가 중요하고 선을 넘는 것은 범죄로 간주합니다. 어디를 가든 개인정보에 동의받습니다. 그런데 이 동의를 수락하지 않으면 그동안 누렸던 일상의 편의를 아예 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죠.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기분입니다. 아마도 대부분 사람은 이제 약관 내용을 읽지도 않고 동의할 겁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삶은 ‘스마트폰'이라는 개인화 기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 기계는 주인조차도 흐릿한 기억을 모두 흡수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볼 수 있는 우주와 지상 세계의 경계선 언저리에 있는 하늘의 구름을 뜻하는 클라우드(Cloud)라는 곳의 창구가 되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은 똑같이 생겼지만, IT기업들은 이를 인격체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은행 계좌처럼 계정(account)이 있죠. ‘그 계정에 맞춤 정보’라는 명목으로 필터를 사용해 접근합니다. 바로 ‘개인화 알고리즘’이라는 방법입니다. 플랫폼 기업들이 어느 정도로 세분화해 필터는 조절하는지를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검색을 포함한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를 분류하고 조절하고 있을 겁니다.
소셜미디어를 접하면 친구를 추천 받게 되는데, 결국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연결을 시도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들과 의견이 있음에도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을 제한하고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보게끔 강제하는 것이죠. 개인화 알고리즘의 위대한 출발이 사용자의 편의였다 해도 결과적으로 인류 문명사회의 왜곡을 초래하는 결과가 됐습니다. 이 현상을 '필터 버블(Filter Bubble)'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 겁니다. 우리의 눈을 왜곡하는 이런 광학적 필터는 악용되기도 합니다. 소위 가짜뉴스(Fake News)가 그것이고 실제로 2016년 미국 대선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실제의 삶과 온라인의 삶이 병행하는 셈입니다. 물론 그 둘은 분리되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실재에 깊숙하게 박혀 있지요. 신조어로 ‘본캐’(본래의 캐릭터)와 일종의 ‘부캐’(부가 캐릭터)로 자아가 형성된 겁니다. 그런데 소위 온라인 친구가 꽤 많은 저조차도 제 생각과 유사한 사람들만 주변에 남았더군요. 이유가 단지 알고리즘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혐오했던 편가르기를 제가 하고 있더군요. 부캐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기도 하지만, 우리가 보이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기도 합니다. 편린의 정보로 우리는 그 상대를 판단하고 그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하며, 반대편을 혐오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전부터 가식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에버랜드 메타버스는 가상공간에서 티익스프레스, 슈팅 워터펀 퍼레이드카 물총싸움, 반딧불이 잡기 체험 등 3가지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사진은 에버랜드 메타버스 서비스를 홍보하는 모델들. 사진제공 = 에버랜드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그런데 부캐로 그 가면을 쓰는 행위가 더 수월해진 겁니다. 우리는 그 가면 뒤에서 우리의 본 모습을 감추고 사는 듯 합니다. 그동안 글과 말로 공감과 배려를 외치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결국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라는 어느 책의 제목처럼 저는 균열한 땅의 어느 다른 한편에 서 있었습니다. 진정한 연민과 공감은 우리가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만든 거대한 시스템에 갇혀 이런 능력을 어느 순간 상실한 셈이죠. 인간은 집단 내에서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능력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능력은 연민과 공감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를 통해 획득한 능력이라더군요. 우리가 짧은 시간 동안 필터 버블에 갇혀 그동안 진화로 쌓아온 능력을 한순간에 상실한 듯 보입니다. 우리 스스로 지금 이상하고 어색한 지점에 서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요? 사람들은 이 두 세계에서 점점 피로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허구 혹은 가상의 세계가 우리 주변에 만들어집니다. 이 세계는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만져지지도 않는 세계입니다. 소위 메타버스라고 하는 세계이지요. 지금이야 그 세계가 약하게 세상과 결합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등장하는 메타버스 콘텐츠는 실재의 확장이나 공존이 아닌 실재를 대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표현할 단어가 미약해 ‘가상(virtuality)’이라는 용어로 마치 렌즈를 통과한 허상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분명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진짜 세상일 겁니다. 가상이 가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거기에 부캐인 아바타는 어쩌면 지금의 법적인 인간처럼 식별자가 부여되는 존재로 그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겠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118개의 원소로 구성된 물질이 아닌 상상의 물질도 존재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화학공학자로 상상의 물질을 합성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보니 흥미롭긴 합니다.
최근 ‘공정’이란 용어가 이슈입니다. 지금의 인류가 이룩한 문명구조에서는 도무지 공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메타버스라는 세계에서는 우리가 이룩하지 못했던 공정의 기회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 유명 대학의 오픈된 강의를 들을 수 있고 학위를 얻을 수 있다면, 그동안 획일적인 공정 담론으로 지친 인류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특히 여기에 젊은 층의 참여자가 많은 이유도 현실 세계의 불평등과 불공정에서 탈피한 세계에서 기회와 만족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메타버스가 이 시대에 들어 맞는 이유도 아마도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불안 요소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그동안 가면을 쓴 것처럼 살았는데 가면을 하나 더 쓴다면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요? 비로소 우리는 두 개의 가면을 써야만 만날 수 있는 진실을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더 평등해지고 공정해지며 솔직해질 수 도 있겠지요. 그런데 진정한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만 있는 건 아닐겁니다.
최초의 탄생은 유토피아적일 수 있으나, 현실 세계에서 문제시되는 것들이 또 다른 형태로 반영되거나 변형되어 나타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일어날 거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완벽하지 않은 세계의 빈틈을 타고 더 나쁜 일들도 벌어질 수 있겠지요. 지금도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서 악플이나 N번방과 같은 사건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새로운 세상은 오감을 사용했던 인류문명이 제한된 감각으로 살아야 하는 세계입니다. 오히려 그동안 억누르고 제한된 감정이 표출되며 지금의 각종 차별과 폭력 등 인간의 민낯이 고스란히 반영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마주하며 눈빛을 보고 목소리의 온도와 몸동작 등을 온몸으로 느끼며 소통해 왔고, 감정을 교환했습니다. 소위 공감력은 단순한 소통을 떠나 지식과 감정의 전달을 유산처럼 물려받으며 인류가 진화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죠. 그런데 일부 감각기관만을 사용하는 세계에서 그 능력은 급감할 겁니다. 간혹 문자로 대화하는 경우 의도치 않은 문장으로 서로 오해하는 경우가 생기는 경험을 했을 겁니다. 지금의 대표적인 사회악인 서열화는 삶의 점수로 대체되며 더 극명하게 자신의 위치를 전체에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좁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의 실재의 자아와 가상 세상이라는 전체 속에서 자아의 식별은 우리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질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자존감의 전체 평균이 낮아진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자아를 전체 속에서 위치로 파악했을까요?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으로 강력한 권력이 우리 삶을 간섭?통제하는 체제, 우리 스스로 혐오했던 그 전체주의 안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에는 ‘빅브라더 Big Brother’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이 용어는 정보를 독점해 사회를 관리하는 권력을 말하고 이 소설에서 처음 등장했죠. 오웰은 전쟁과 질병에서 자유보다 안전을 중시할 때가 감시사회의 출발점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미중의 새로운 냉전, 그리고 감염병에서 우리는 그 이전의 자유를 그리워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뉴노멀을 이야기합니다. 다시는 과거의 그 시절로 갈 수 없다고 하지요. 그리고 포스트 휴먼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스스로도 안전과 편리를 택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와중에 등장하는 인공지능과 메타버스가 빅브라더처럼 다가오기에 마냥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지금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세상에 대해 질문을 할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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