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형 금융부장

[데스크칼럼] '안보'가 '경제'를 압도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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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 하면 '비옥한 흑토지대'가 떠올랐다. '오렌지 혁명'(2004년)은 들어봤지만 '유로마이단' 시위(2014년)는 몰랐다.


러시아가 조지아 전쟁(2008년), 크름반도(크림반도) 합병(2014년)을 했을 때는 해당 지역에 친러시아인들이 많았고 그들이 원한 결과였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2개 공화국을 승인하는 데 그쳤다면 똑같이 봤을 것이다.

전면전이 벌어지면서 여러 책과 자료, 유튜브 등을 찾아봤다. 소련이 스탈린 시절 집단농장화 추진 과정에서 벌인 1932~1933년의 '홀로도모르(기근 학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탄압 등을 알게 됐다. 한국외대 우크라이나어과에 재직하고 있는 올레나 쉐겔 교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는 한국-일본 관계와 비슷하다"고 했지만 내 생각엔 한-일 관계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적어도 200만~700만명을 굶겨 죽이진 않았다. 러시아의 침공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이렇게 강력히 저항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우크라이나 사태 뒤엔 거대한 세계관의 충돌과 대립이라는 문명의 단층이 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지난 21일 1시간 넘는 연설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운명적·역사적 일체성을 강변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푸틴의 사상적 기반이 '대(大)유라시아주의'라는 점을 지적했다. 大유라시아주의는 러시아가 서로마와 동로마를 계승한 제3의 로마이고, 러시아정교는 그 영혼이며, 모스크바는 모든 동방정교들과 세계문명의 수도라고 주장한다. 러시아문명이 주축이 되어 유럽과 아시아를 이끌고 이슬람과 아시아 유교문명까지 견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문명은 인류를 타락시킨 원흉이라고 본다. 大유라시아주의의 브레인은 러시아 사상가 알렉산더 두긴(Alexander Dugin, 1962~)이라고 한다.

푸틴의 大유라시아주의는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겹친다. 두 사람의 별칭도 '21세기 차르'와 '시황제'로 국가주의(nationalism), 전체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냉전 시절 미국과 양극체제를 이뤘던 '소련의 영광'은, 서구의 산업혁명 이전까지 역사의 대부분을 최강의 부유한 국가로 있었던 '중국의 영화(榮華)'와 대비된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시대의 전환점’으로 세계 전후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대만 문제로 미국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홍콩 민주화 탄압, 신장-위구르 인권 문제, 기술 탈취와 보조금 지급 등 불공정 무역 등으로 자유민주 진영과 갈등을 빚고 있기도 하다. 푸틴은 2008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는 진정한 국가가 아니다”라고 말했고, 시진핑은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다.


바야흐로 안보가 경제를 압도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는 '좀 더 잘 먹느냐 덜 먹느냐'의 문제이지만 안보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뭘 택해야 할 지는 뻔하다.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전체주의 진영 간 지정학적 갈등이 더 깊어지면, 냉전 때만큼은 아니겠지만 경제 체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미 첨단 기술과 제품은 '공급망 분리' 단계에 와 있다. 희소금속, 석유, 가스 등 원자재도 자원 무기화에 동원될 수 있는 만큼 '공급망 분리'에 대비해야 한다. 앞으로 낮은 기술의 저부가가치산업, 노동집약적 산업, 1차 산업 등 정도만 세계화 시대처럼 예외적으로 자유롭게 교역되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미국은 지난 24일 러시아의 침공 당시 대(對) 러시아 ‘해외직접제품규칙(FDPR)’ 수출 통제 규제를 발표하면서 제재에 동참한 유럽연합(EU)·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일본에 대해서만 FDPR 면제 조치를 했다. 한국은 28일에야 대러 전략물자 수출 차단을 결정해 미국에 통보했고, 4일에야 면제 조치를 받았다.


'안미경중(安美經中)'은 이제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국도 비공식 안보회의체 '쿼드'(미국·인도·일본·호주)에 가입해야만 하는 시기가 닥칠 수 있다.


어쨌든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로 명확해진 것들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더이상 평화의 시대, 세계화의 시대가 아니다. 새로운 국제질서가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형성될지에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의 결과가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제발 잘 버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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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크라이, 우크라이나(Don’t cry, Ukraine)! 세계가 당신들과 함께 한다."


정재형 금융부장 jj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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