얍 판 츠베덴 지휘
KBS교향악단 '소리, 빛이 되어'
반복에 반복, 엄혹한 리허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현악군 연주 정교하고 치밀
세밀화처럼 베토벤 시련 묘파
츠베덴 손끝서 걸작 살아나
코로나 이후 국내 오케스트라
외국 지휘자·협연자 교류 끊겨
매너리즘 빠질까 우려
거장 츠베덴과의 연주 충격
KBS·서울시향 등 각성 계기
롤러코스터에 타는 사람들은 잠시 후 벌어질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한다. 실제 느낌은 그보다 훨씬 짜릿하고 가슴 철렁해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는다. 얍 판 츠베덴의 지휘도 그랬다.
현재 뉴욕 필과 홍콩 필의 음악감독인 네덜란드 지휘자 츠베덴이 KBS교향악단을 지휘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단원들 고생 좀 하겠군’이었다. 3년 전 츠베덴이 경기필하모닉을 지휘해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했을 때가 생각났다. 디테일에 집중하며 단원들을 ‘조련’한 결과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며 밸런스 잡힌 연주를 들려줬었다.
이번에도 공연 전 츠베덴의 엄혹한 리허설 이야기가 들려왔다. 세부를 살리고 원하는 작은 차이를 만들기 위해 반복 또 반복하는 모습이 ‘마른 오징어를 쥐어짜듯 한다’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론 어쩌다 한 번 객원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 정성을 다 쏟는 그의 모습에서 진짜 지휘자의 실루엣이 떠오르기도 했다.
디데이는 10월2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츠베덴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의 제771회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과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을 1, 2부에 나눠 선보인 이날의 연주는 ‘소리, 빛이 되어’라는 제목처럼 환하게 기억난다.
단원들이 착석한 가운데 츠베덴이 인사하고 객석에 등을 돌리자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동기가 번득이며 빛을 냈다. KBS교향악단의 현악군은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하고 치밀했다. 번짐이 없는 펜으로 그린 세밀화처럼 적나라하게 베토벤의 시련을 묘파했다. 청중들은 삼척동자도 다 알 법한 유명한 곡에 편안하게 감정을 이입하기보다는 연주가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에 시선을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지휘자의 손끝에서 드러나는 의도가 오케스트라의 곳곳과 이어져서 거대한 몸체를 제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소리는 한 줄기 빛이 되기도 하고 건물 같은 공간이 되기도 한다. 소리가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공간이 구축되어갔다. 관과 현이 맞닿는 지점이 2차원을 뚫고 나와 3차원의 건축물을 만들고 있었다. 제자인 쉰틀러가 첫 네 음의 의미를 묻자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네"라고 답했다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에 혈색이 돌았다. 정확하면서 리드미컬한, 직선과 곡선을 섞은 예술적인 마감이 베토벤의 너무나 유명한 걸작에 색깔을 불어넣고 살아 숨쉬게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필자를 포함해 객석에 있던 청중들은 숨 쉴 틈이 없었다. 츠베덴은 프레이징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는 교묘한 전략으로 한 순간도 주목과 집중을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이돌 그룹의 칼군무를 연상시키는 바이올린, 첼로 등 현악군의 정확하고 민첩한 연주 위에서 플루트와 클라리넷과 오보에, 바순 등 목관군이 지저귀었다. 3악장에서 더블베이스, 첼로와 비올라, 바이올린으로 이어지는 작은 푸가는 그야말로 프리즘을 통과한 색깔을 보듯 뚜렷했다. 어둠에서 광명으로 상승하는 4악장의 도약은 더없이 찬란했다. 단순하게만 여겼던 리듬을 쪼개 탄력을 주는 치밀함에도 베토벤을 면밀히 연구한 끝에 다다른 자신감이 배어있었다.
2부의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에서도 현악군의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졌다. 적재적소에 호쾌한 타악기의 타격이 방점을 찍었고 절묘한 트릭 같은 전환이 작곡가 특유의 톡 쏘는 맛을 살렸다. 금관의 포효가 곡의 캔버스를 팽창시키고 곡의 진수를 제대로 알려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흥분을 가눌 수 없었던 밤, 집에 돌아와 츠베덴이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과 7번이 수록된 음반(데카 골드)을 들었다. 그러나 공연장의 생생한 공기와 함께 들었던 팽팽함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이날 KBS교향악단은 음반 속의 뉴욕 필하모닉보다 더욱 선명한 연주로 족적을 남겼다. KBS교향악단 단원들의 기술은 국내 최고 수준이다. 지휘자를 잘 만나면 미국 유럽 오케스트라를 능가하는 ‘인생연주’를 들려주는 날들이 있다. 러시아 지휘자 알렉산더 라자레프가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을 지휘했을 때, 그리고 이날 베토벤 교향곡 5번을 그 예로 꼽을 만했다.
1960년 암스테르담에서 피아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난 츠베덴은 다섯 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사라 장의 스승인 도로시 딜레이에게 배웠다. 19세 때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사상 최연소 악장으로 입단해 1995년까지 재임했다.
츠베덴은 번스타인의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지휘를 시작했지만 그 이전부터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수많은 거장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양한 지휘의 양상을 배웠다고 밝혔다. 2000년 헤이그 레지덴티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시작으로 2005년 네덜란드라디오필하모닉 수석지휘자, 2008년 댈러스 심포니 음악감독, 같은 해 앤트워프 심포니 음악감독에 이어 2012년 홍콩필하모닉 음악감독에 취임, 2018년 뉴욕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해서 활동 중이다. 구스타프 말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레너드 번스타인, 피에르 불레즈, 주빈 메타, 로린 마젤이 지휘했던 전통의 악단에서 앨런 길버트의 후임으로 지휘하고 있다.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는 츠베덴의 지휘 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작년 홍콩필과 내한, KBS교향악단 객원 지휘가 취소됐고, 11월에는 본인이 코로나 확진자가 됐다. 해외 활동이 막히고 네덜란드에 머물면서 음악계 인력들이 40%가량이나 해고되는 것을 지켜보며 무력감과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 운동을 시작했다. 그 결과 6개월 동안 30킬로그램을 감량했다. 지금도 복싱 트레이닝을 받는다고 한다. 지휘대에서 게오르그 숄티의 모습을 연상시켰던 잽과 훅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뉴욕타임스에는 츠베덴이 2023·2024 시즌을 마지막으로 뉴욕필하모닉과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기사가 실렸다. 홍콩필하모닉도 그때까지 계약이 연장된 상태다.
츠베덴과 KBS향의 이날 만남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흐르는 전류 같았던 그 충격은 KBS향, 서울시향을 포함한 우리 오케스트라들이 각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본다.
코로나가 창궐한 2020년 초 이후 1년 이상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들은 외국 지휘자 및 협연자와의 교류가 끊기다시피 했다. 공연은 취소되기 일쑤였다. 지휘자와 협연자가 바뀌고 대편성이나 성악이 있는 프로그램은 소편성으로 축소하거나 성악이 없는 작품으로 바꿔 공연했다. 해외와 교류가 뜸해지면서 우리나라 악단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의 시선이 공연애호가들의 표정에서 보였다.
이날 츠베덴의 지휘는 김덕재 KBS교향악단 신임 사장뿐 아니라 서울시향의 손은경 사장과 강규형 이사장 등 타 악단 경영진들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서울시향 오스모 벤스케 음악감독의 임기는 2020년 1월부터 3년간으로 2023년 1월 종료된다. 벤스케의 향후 계약은 어떻게 될까. 계약 연장일까 후임 선출일까. 혹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한국 오케스트라의 히딩크가 될 수 있을까. 코앞에 다가온 2022년,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관심을 끌게 될 전망이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상장 첫날 70% 폭등 "엔비디아 독주 끝나나"…AI ...
류태형 음악 칼럼니스트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