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침묵의 나선이론과 김지은'들'
[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성폭력을 당한 김지은씨는 2018년 3월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이후 검정색 옷과 모자로 꽁꽁 사매고 외출을 했다고 한다. 때때로 화사한 옷을 입고 싶지만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날까 우려돼 눈에 띄지 않는 검정색만 고집했다. 미투 1년이 지난 지난해 3월 최악의 미세먼지가 덮치자 눈치를 보지 않고 마스크를 쓸 수 있어 '미세먼지가 반갑다'라고 했다.
올해 초 발간된 '김지은입니다(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는 안희정 미투 이후 김씨의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이 고스란히 담겼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두려워 외출을 피하고, 이름이 호명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김씨는 이 책에서 "성폭력이 신체와 정신에 대한 살인이라면 2차 가해는 현재의 삶, 과거와 미래, 자아, 인격에 대한 살인이었다"고 썼다.
안 전 지사는 지난해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교도소에 수감 중이지만, 김씨를 향한 2차 가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안 전 지사 지지자뿐 아니라 호사가들 사이에선 두 사람의 '불륜 관계'가 기정사실이 됐다. 최근 사석에서 들은 가장 황당한 이야기는 안 전 지사를 고소한 또 다른 피해자를 거론하며 "안희정의 불륜녀가 여러 명인 탓에 김지은이 질투심에 미투를 했다"는 왜곡이었다. 안 전 지사의 재판 과정에서 그의 측근들이 김씨에게 씌운 '안희정 사생팬'이라는 프레임과 안 전 지사의 유죄 판결 이후 안 전 지사 부인이 주장한 "미투가 아닌 불륜"이 여론을 지배한 탓이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피해자가 지난 5월 김재련 변호사를 처음 찾아왔을 당시, 지금처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심각한 상황이 아닌데도 마스크를 써 얼굴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박 전 시장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는 '안희정 사건'을 꼭 닮았다. 오성규 전 서울시장 비서실장은 이달 초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고소인(피해자 A씨)은 고인(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존경하는 분으로 표현했고, 위력에 의해 의사가 제압돼 추행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하는 고소인의 주장에 반하는 정황과 증거가 우세하다"고 했다.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박 전 시장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좋아요'를 누르고 자신의 SNS에도 #감사 #박원순 #만세 등을 썼기 때문이란다. 친여 성향의 유튜브 채널에선 피해자가 민소매 차림의 사진을 박 전 시장에게 보냈고 A씨가 오히려 박 전 시장에게 무릎에 '호~ 해달라'라고 요청했으며 박 전 시장의 생일파티나 등산 때 신체를 접촉했다는 주장도 난무한다.
'침묵의 나선이론'이라는 미디어 이론이 있다. 사람들은 사회에서 자신의 견해가 우세한 다수 의견에 속하면 공개적으로 의견을 표명하고, 소수에 속할 경우 침묵을 지키며 다수의 의견이 여론이 된다는 이론이다. 행동하는 소수는 사회의 주목을 받기 쉽고, 이들의 행동은 TV와 신문 등 주요 언론 매체들을 통해 보도돼 일반 시민들은 행동하는 소수를 마치 지배적 다수로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책에서 안 전 지사 부인이 유죄 판결 직후 올린 글과 이를 자극적으로 옮겨 적은 언론 보도가 나올 때마다 "발가벗겨져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며 "모두가 공범"이라고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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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시장의 피해자는 이보다 더 힘겨운 싸움이 예상된다. 경찰은 최근 서울시 관계자들이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을 방조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박 전 시장의 휴대전화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에서 기각됐다고 밝혔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다. 경찰이 박 전 시장의 범죄 여부를 규명하기 요원해졌다는 의미다. 이제 박 전 시장이 성추행 피소 사실을 알게 된 경위를 밝혀내는 검찰 조사와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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