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수교 30주년, 민관 문화 교류 잇따라
볼쇼이 발레 충격 되살릴 클래식 공연 쇄도
안나 네트렙코 등 오페라 스타 무대도 관심

한정호 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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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클래식 시장의 최대 화두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 탄생 250주년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취소된 국제적 페스티벌과 해외 저명 악단의 2019/20 잔여 시즌 프로그램에는 대개 베토벤 주요 작품이 들어 있다.


국내 시장으로 좁히면 올해 이슈는 한국과 러시아 수교 30주년 기념 이벤트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20-2021년을 '한·러 상호 문화교류의 해'로 공식 지정하고 2019년 러시아 문화부와 업무 협약도 맺었다.

러시아는 외교적으로 신북방 정책의 핵심국이자 여러 예술 장르에서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문화 강국이다. 러시아 문화부는 '러시아 시즌'을 내년 한국에서 열자고 제안했다. 이는 자국 문화예술을 엄선해 선보이는 행사다.


그동안 국내에서 러시아 공연 예술을 안내한 창구는 민간 기획사, 언론사 문화사업부, 대기업 문화재단이었다. 기획사가 초청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상트페테르부르크 필,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방한을 통해 발레리 게르기예프, 유리 테미르카노프, 미하일 플레트네프 등 거장 지휘자도 볼 수 있었다.

언론사 문화사업부는 2000년대 후반까지 볼쇼이 발레단, 마린스키 발레단을 빈번히 서울로 불렀다. LG아트센터는 러시아 말리 극장, 발레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을 소개했다. 올해 11월에는 노보시비르스크 레드 토치 시어터 공연도 추진 중이다.


러시아는 아편전쟁(1840~1842) 이후 1860년 맺어진 베이징조약에 따라 연해주 할양으로 두만강 하안을 경계로 한반도와 지리상 연결됐다. 러시아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해 대(對)한반도 영향력을 급격히 잃었다. 하지만 옛 소련이 북한 정권 성립과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하고 나서 한국과 옛 소련은 전형적인 적대관계에 놓이게 됐다.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고 옛 소련이 북한의 반대를 무릅쓰고 1988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면서 한·소 국교 정상화의 길이 열렸다.


서울올림픽 문화 축전의 하이라이트는 옛 소련산 공연 예술이었다. 모스크바 필하모닉이 훗날 KBS교향악단 음악감독이 된 지휘자 드미트리 키타옌코와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재소련 고려인 성악가인 소프라노 넬리 리(1942~2015), 메조소프라노 루드밀라 남(1947~2007)의 독창회는 눈물바다를 이뤘다. 문화 축전 기간 중 볼쇼이 발레단의 일부 무용수만 참가한 공연도 성황리에 마쳤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오페라-발레 극장인 모스크바 볼쇼이 오페라 하우스 (c) Dmitriy Guryanov

러시아를 대표하는 오페라-발레 극장인 모스크바 볼쇼이 오페라 하우스 (c) Dmitriy Gurya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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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서울 올림픽 문화 축전 참가한 고려인 소프라노 넬리 리 (c) Petrovna

1988 서울 올림픽 문화 축전 참가한 고려인 소프라노 넬리 리 (c) Petrov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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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 공연 예술을 둘러싸고 고조된 관심은 '진품' 볼쇼이 발레단에 몰렸다. 1990년 볼쇼이 발레단은 '백조의 호수', '지젤'로 한국을 찾았다. 그리고 1992년 '스파르타쿠스'로 다시 서울에 왔다. 이때 일반 애호 관객뿐 아니라 정·재계 인사들도 볼쇼이 발레단 공연을 보면서 "낙후된 국내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2010년 국립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의 각 단체 주역 상호 교류 공연으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달라진 한국 발레의 수준을 체감했다. 한국의 발레 인재들이 국제 경연에서 주목받는 요인은 탄탄한 기본기 덕이다. 국내 교육기관 대다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바가노바 아카데미의 발레 메소드를 따른다.


러시아 정부는 특정 국가와 외교관계에 있어도 아무 국가와 문화협력을 도모하진 않는다. 전략적으로 이해가 맞아떨어질 때 자국의 고급 예술을 맛보게 한다. 2017~2018년 러시아는 일본과 본국에서 러시아 시즌을 진행했다. 당시 게르기예프,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가 일본 전역을 돌아다녔다. 전체 러시아 예술단이 일본의 42개 도시에서 250여개 이벤트를 진행하고 여기에 350만명이 참여했다.


러시아 정부가 보증하는 '러시아 최고의 예술가' 인증이 일본 현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년 한국에서 개최되는 러시아 시즌 라인업이 기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러시아 당국은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 프리모르스키 극장을 개관하고 마린스키 극장 분관으로 지정했다. 동아시아 공연예술 분야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분명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돈독한 관계에 있는 게르기예프가 한국·일본·중국을 자주 방문하고 박원순 서울시장, 서병수 전 부산시장 등 정치 지도자들과 미팅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러시아 대외 문화정책 집행의 실무 기관은 외교부 산하 국제과학문화교류협력센터다. 드리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집권 이후 '유로-태평양 국가' 정체성을 강화해온 러시아의 외교정책은 동북아시아에서 상하이협력기구(SCO)로 구체화했다. 일본과 한국에서 러시아 시즌은 러시아 주도의 지역 세력망 구축에 디딤돌로 쓰일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 출신의 클래식 아티스트가 세계적 명성을 얻으려면 서방에 나가야 한다. 서유럽에서 성공한 음악가들이 국제시장에서 먼저 주목받는다. 레닌그라드 출신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키로프극장(마린스키 극장의 옛 소련 시절 명칭)에서 극장감독 게르기예프의 발탁으로 음악계에 이름을 알렸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 최정상의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c) Vladimir Shirokov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 최정상의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c) Vladimir Shirok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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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렙코는 2006년 오스트리아로 건너간 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센세이셔널한 연기로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몸무게가 늘어 리릭에서 드라마틱으로 소리 성질이 변했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소프라노 아이다 가리풀리나는 러시아 남부 카잔 태생이다. 부모는 장래에 딸이 가수가 되길 바라며 오페라명과 겹치는 '아이다'로 이름 지었다. 2013년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주최의 오페렐리아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데카 레이블 계약, 빈 슈타츠오퍼 입단이 뒤따랐다.


가리풀리나는 2014년만 해도 한국 민간 오페라단 초청 공연에 한복을 입고 나타나는 루키 이미지였다. 하지만 4년이 지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에 출연할 만큼 국제적인 거물로 성장했다. 메이저 오페라 극장에서 한 자리씩 주역을 차지한 그는 목소리만큼이나 외모 관리에도 철저하다.


소프라노 율리아 레즈네바는 사할린에서 태어나 고려인들과도 어울리며 자랐다. 합창단 활동 후 모스크바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고음악과 로시니 오페라에서 기초 교육도 받았다. 영국 유학 시절부터 나이브 레이블에서 고음악에 특화한 트릴 기교가 빼어났던 그는 데카 레이블 계약으로 활동에 날개를 달았다. 목소리가 좀처럼 쉬지 않을 만큼 싱싱함을 유지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그 축복이 유지될지 본인의 전막 소화 능력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남부 우랄 지대의 바시키르 공화국 태생인 메조 소프라노 아이굴 아흐메시나는 무수한 콩쿠르에서 거듭한 입상과 실패 덕에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2017-18 시즌 로열 오페라 제트 파커 청년 음악가에 선정됐다. 이후 주어진 로열 오페라 무대에서 묘한 오라로 영국 런던의 관객을 사로잡았다. 관객들은 1990년대의 네트렙코를 보는 듯했다.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에서 노래한 소프라노 아이다 가리풀리나 (c)Decca  Simon Fowler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에서 노래한 소프라노 아이다 가리풀리나 (c)Decca Simon Fow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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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로열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출연한 메조 소프라노 아이굴 아흐메시나 (c) Andrey Uspensky

영국 로열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 출연한 메조 소프라노 아이굴 아흐메시나 (c) Andrey Uspen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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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메시나가 '카르멘', '나부코'처럼 중량감 있는 소리를 표현할 때면 들을수록 신비감이 고조된다. 이런 저력 덕에 베를린 필, 메트 오페라, 바덴바덴 페스티벌 출연을 예약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 출신의 피아니스트 율리아나 아브제예바는 2010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독특하게도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아닌 야마하의 야심작 CFX로 우승해 또 하나의 벽을 깼다. 명문 레이블과 계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 대회 우승자가 다음 대회 우승자와 비교되는 정글로부터 자유로워진데다 음악만으로 승부하는 마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브제예바는 천둥 같은 굉음도 내지만 포효가 필요한 순간 적당한 크기만 물어뜯는 영리함까지 갖췄다. 의무적으로 치다시피한 야마하 대신 스타인웨이로 고전 작품을 탐색할 만큼 편견과 선입견 역시 배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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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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