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투입이냐 금리 인하냐?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1920년대 이전에는 금융 정책이 중심이었다. 금본위제로 원하는 만큼 통화를 공급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보다 통화량을 가지고 경기를 조절했다. 재정 정책으로 주도권이 넘어온 건 대공황 때부터다. 극심한 경기 침체로 민간 수요가 줄어들자 정부가 개입에 나선 것이다. 1960년대에 다시 금리를 가지고 경기와 물가 조절에 나섰고 그 기조가 최근까지 이어졌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금융 정책의 영향이 최고에 달한 후 중심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경제학 용어 중에 '유동성 함정'이라는 게 있다. 금융 완화 정책을 써도 이자율이 낮아지지 않고 투자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처음 이 말을 사용했는데 대공황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금융 정책 외에 강력한 재정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 썼다.
세계 주요국 기준 금리가 0%대로 떨어졌다. 여기에 대규모 양적 완화가 더해졌지만 경제가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 최근만 그러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 때문이려니 생각할 텐데 2~3년 전부터 금융 정책의 역할이 현저히 약해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기준 금리가 시중 금리의 하한선으로 작용하는데 금리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수준까지 떨어진 게 금융 정책의 역할이 줄어든 이유로 생각된다. 유동성 함정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게 재정 지출 확대다. 저성장ㆍ저물가ㆍ저금리 상황에서는 재정 정책이 더 효과가 있으므로 될 때까지 돈을 풀자는 것이다. 기존의 재정 정책에서 한 보 더 나아가 중앙은행의 무제한 양적 완화에 정부의 무제한 재정 지출이 더하자는 의견까지 제시되고 있는데 이를 현대통화이론(Modern monetary theory; MMT)이라 한다.
이 정책을 사용할 때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게 물가다. 통화가 많이 풀리고 재정지출이 늘어나면 물가가 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짧게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20년간, 길게 보면 1960년 이후 40년간 세계 경제는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왔다. 베이비 붐과 공업화로 수요가 크게 늘어난 반면 신흥국의 낮은 기술 수준으로 공급이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1980년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인플레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20%까지 인상해야 할 정도로 고통이 심했었다. 경계해야 할 부분이긴 하지만 지난 수십년간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이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무제한 자금 공급은 인플레보다 다른 부문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제일 걱정되는 곳이 금융시스템이다. 자금이 자산시장에 몰려 버블이 만들어질 경우 신용시장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재정을 집행하는 정부 권력의 힘이 강해져 경제 주체간에 견제가 이뤄지지 않는 점도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
이런 제약 요인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국내외 모두에서 재정 정책이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 대책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2조2000억달러의 돈을 투입하기로 했다. 작년 미국 국내총생산(GDP) 21조4000억달러의 10.3%에 달하는 액수로, 기업어음(CP)과 회사채 매입 등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쓰기로 한 금액의 3배다. 금융위기 당시 6개월간 2차례 경기부양에 1조6000억달러가 투입됐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에 재정 정책이 얼마나 강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유럽에서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이 대규모 재정 집행 계획을 발표했다. 질병의 확산으로 경기 위축이 예상돼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우리 정부도 소득 하위 70%인 1400만 가구에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기존 세출사업 감액이 주요 재원이지만 일부는 재정 부담과 국채발행 확대를 통해 해결할 예정이다. 3월 중순 추경 편성에 이은 두 번째 조치로 우리 정부의 대응도 금융 정책에서 재정 정책으로 넘어오고 있는 증거다.
이렇게 재정 정책이 강화되고 있는 건 다른 수단이 없어서다. 작년 하반기 이후 Fed가 금리를 빠르게 내렸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3월에 단행됐던 1.5%포인트 금리 인하는 왜 금리를 내렸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돈을 푸는 것도 결과가 비슷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이 아직 Fed의 정책 여력이 남아 있다고 얘기하지만 금리 수준을 감안할 때 더 이상의 정책이 나오기 힘들다. 이번에 Fed가 발표한 국채와 회사채 무제한 매입은 순수 금융 정책이 아니다. 4500억달러에 달하는 재무부의 구제금융 자금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재정과 금융 정책이 반반씩 섞였다고 봐야 한다. 미국에서 금융 정책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금융 정책이 가지고 있는 제약 요인도 재정 정책을 불러낸 이유가 되고 있다. 금융 정책은 중앙은행이 결심만 하면 되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시행할 수 있지만 적용범위가 넓어 특정 부문에 미치는 효과가 약하다. 반면 재정은 핀셋 형태로 원하는 곳에 정책을 집중할 수 있어 강한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처럼 가계부문의 소비 둔화를 집중 관리해야 할 때 재정 정책을 쓰는 게 더 효과적이다.
정부가 재정 투입을 늘리겠다고 발표하자 적자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렇게 쓰다 보면 곧 나라 곳간이 거덜 날거란 얘기였다. 우리는 정부부채가 GDP의 40%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나라다. 재정 추계가 시작된 이후 국민에게 걷은 만큼만 써야 한다는 생각이 철저히 지켜진 덕분인데 그 결과 북유럽의 몇 개국을 제외하고 우리보다 재정 건전성이 좋은 나라는 찾기 힘들 정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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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재정 지출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을 얘기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 오랜 시간 후 생길지 모르는 부작용이 겁나 정책 사용을 주저한다면 나중에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 대공황이 정부의 개입이라는 새로운 경제 철학을 만들어낸 것처럼 지금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이전과 다른 정책을 사용해야 한다. 재정은 필요할 때 쓰고 상황이 정리되면 오랜 시간을 두고 다시 보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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