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박경리 등 여성작가 25명‥그들이 남긴 말·삶·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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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소연 기자] 글에는 기득권층에서 숨기고 싶어하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 힘이 있다. 작가는 포기를 모르는 종족이다. 이들은 폭력적이고 모순적인 제도로 인간이 피폐해져 가는 현장을 끝없이 고발한다. 미래는 달라질 수 없다고 단정하는 '도덕적 피로'를 경계하고, 결국 글 쓰는 이도 읽는 이도 사람답게 만드는 삶의 길잡이가 된다.


글 속에는 삶의 추악한 모습, 외면하고 싶은 현재뿐만 아니라 대안 같은 세상, 따뜻한 위로와 희망도 있다. 펜을 든 사람은 나와 타인도 구원하고 세상까지 바꾼다.

작가들에게 글쓰기란 때로 생명줄과 같다. 박경리 작가는 암 수술 이후 퇴원한 지 보름만에 '토지'를 쓰기 시작했다. '암흑시대'는 죽은 자식을 화장터에 놓고 온 그날부터 달라붙어 쓴 책이다.


중국계 작가 이윤 리는 톈안먼 사태 생존자다. 그는 당시 시위에 참여하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을 집안에 가둬버렸다. 유혈사태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살아남은 그는 톈안먼 사태 생존자들이 수십년간 겪어야 했던 일들을 글로 썼다. 피처럼 토해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다.

신간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에는 글쓰기로 세상을 바꾼 여성 25명의 삶과 철학이 담겨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버지니아 울프, 박경리, 프리다 칼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에밀리 브론테, 수전 손택, 이윤 리 등 위대한 여성작가들. 이들의 삶과 작품, 그리고 철학이 담긴 이 책을 끝까지 읽다 보면 단편영화 25편을 본 것처럼 그들의 삶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25명의 여성작가는 어떤 과정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중요한 작품의 탄생 고비마다 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저자는 이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들의 대표 작품들에 대해 소개한다.


그 중에는 친숙한 작품이 있고 생소한 작품도 있다. 책에서 언급된 대다수 작품을 찾아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 책은 이들 작가의 치열한 삶 속으로 순식간 풍덩 뛰어들게 만든다.


뒤라스는 글만 써선 먹고 살 수 없다는 핀잔을 들었다. 울프는 책 읽고 글만 써 우울증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라며 '비극적 최후를 맞은 여성 예술가의 목록'에 오르곤 한다. 박경리는 남성 작가 중심으로 살롱처럼 운영되던 한국의 기성 문단에 잘 섞이지 못했다. 당시 여성들의 경험을 다룬 문학은 사소설로 분류됐다.


이렇듯 자기 삶에 대해 표현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늘 그 가치를 폄하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의 저자는 이런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에게 뒤라스는 글로 생활의 기반을 닦고 자기 인생을 바꾼 빛나는 여성이었다. 울프의 죽음은 전쟁의 참혹함에 짓눌려 더 이상 작가로서 글조차 쓸 수 없게 되자 생을 마감하기로 결정한 시대적 선택이었다. 박경리는 개인이 겪은 모진 고통을 인류 보편의 문학으로 남긴 위대한 작가였다.


저자는 여성 작가들이 직접 남긴 글과 말들을 모았다. 그리고 저마다 스스로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했는지 그 실패와 성공의 기록까지 정성껏 다시 썼다. 저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되 날카롭게 논점을 짚어낸다. 저자의 손끝에서 글 쓰는 여성들의 삶과 철학이 비로소 그 가치를 제대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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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우리는 그동안 오해했거나 왜곡된 형태로 알고 있었던 여성 작가들의 삶을 바로 보게 된다. 책을 덮고 나니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기분이 든다. 마음이 끌리는 책 속 작가의 작품을 자기도 모르게 주문하고 있을지도….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장영은 지음/민음사/1만5000원)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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