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연구가 로빈 월 키머러 '이끼와 함께'

[이종길의 가을귀]인간을 닮은 이끼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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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이끼 집어삼키는 패랭이우산이끼…물 속 24시간도 못 버텨 꼭대기서만 군림

생존력 약한 10종은 중간지역에 고착…계층화·합리적 패턴...'공존의 가치' 짚어


미국 위스콘신주에 있는 키카푸강은 자주 범람한다. 용적량이 적어 큰비는 감당하지 못한다. 날이 개면 절벽 아래는 다양한 음영의 이끼가 수평으로 띠를 이룬다. 고도에 따라 식물 군락은 달라지게 마련. 이끼의 식생도 다르지 않다. 수면에서 멀어질수록 일정한 패턴이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는 조금 다른 양상이 발견된다.

수면부터 위로 30㎝ 공간은 봉황이끼가 검은 띠를 이룬다. 지상부는 8㎜에 불과하나 질기고 뻣뻣한 종이다. 겉보기에는 평평하다. 매끈하고 얇은 칼날 같은 잎 끝에 또 다른 잎이 덮혀 있다. 헛뿌리는 가는 실처럼 생겼다. 자갈 섞인 사암에도 단단히 달라붙는다. 수면 근처에서 단일 군락을 형성하는 비결이다.


봉황이끼 위에는 석회이끼, 철사이끼, 초롱이끼 등 다양한 이끼가 분포한다. 군데군데 비어 있는 공간에서는 사암의 황갈색 표면이 드러난다. 수면에서 손이 닿는 제일 높은 지역은 패랭이우산이끼로 빼곡하다. 패랭이우산이끼는 초록색 살모사 비늘을 닮아 뱀풀이라고도 불린다. 잎과 줄기의 구별이 없는 얇은 엽상체(葉狀體)다. 뭉툭한 삼각형 모양이 독사의 세모난 머리를 연상시킨다. 패랭이우산이끼는 듬성듬성한 헛뿌리로 바닥에 헐겁게 달라붙는다. 바위나 흙 위에 납작 엎드려 영역을 확장한다.

생태연구가 로빈 월 키머러가 쓴 '이끼와 함께'는 이끼의 생태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교양서다. 이끼들의 다양한 삶을 관찰하며 얻은 깨달음이 열거돼 우리의 삶까지 돌아보게 만든다. 키카푸강 이끼들에서는 공존의 가치를 가리킨다. 절벽 아래 봉황이끼와 꼭대기의 패랭이우산이끼, 그 사이에 섞인 다양한 이끼가 분명한 계층화를 보인다는 이유에서다.


어떤 나무가 다른 종의 나무에 그늘을 드리우듯 생태계에서는 예상치 못한 패턴이 종종 일어난다. 저자는 패랭이우산이끼와 봉황이끼 사이의 경계 공간을 경쟁의 결과로 추정한다. 두 종은 따로 떨어져 있으면 잘 지낸다. 그러나 나란히 놓이면 권력 다툼을 벌인다. 승리는 늘 패랭이우산이끼의 몫이다. 뱀 같은 엽상체가 왜소한 봉황이끼를 위에서 아래로 집어삼킨다. 봉황이끼는 생존을 위해 패랭이우산이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그런데 패랭이우산이끼는 수면 근처까지 영역을 확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각 이끼 종이 물 속에서 얼마나 견디는지 실험한다. 물이 채워진 얕은 접시에 종별로 담긴 이끼의 변화 양상을 확인한다. 봉황이끼와 석회이끼는 사흘이 지나도 쌩쌩했다. 반면 패랭이우산이끼는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검고 끈적끈적해졌다. 물 속을 견디지 못해 절벽 높은 곳에 안주했던 것이다.


저자는 범람이 일어난 키카푸강에서도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과는 실험과 일치했다. 봉황이끼는 물이 넘쳐흘러도 잘 지냈다. 유선형 줄기가 뻣뻣해 물의 흐름을 견딜 수 있었다. 패랭이우산이끼는 물이 거의 닿지 않는 지역만 장악했다. 수면보다 훨씬 높은 곳에 안전하게 퍼져 녹색 담요처럼 바위를 빼곡하게 덮었다.


두 이끼 사이의 중간 지역 사정은 어땠을까. 사암의 황갈색 표면이 드러난 맨바위 사이에는 이끼가 무려 열 종이나 서식했다. 범람 빈도가 평균인 지역에서 어떤 종도 서식지를 독점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생태연구가 로버트 페인이 워싱턴주 해안에서 생명체 교란 주기의 차이를 연구한 결과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암석으로 이뤄진 밀물과 썰물의 중간 지대에서 파도 형태와 홍합ㆍ따개비 등의 변화를 살폈다. 홍합ㆍ따개비는 돌에 붙어사는 고착생물이다. 공간을 차지하려 서로 경쟁한다는 점에서 이끼와 흡사하다.


페인은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했다. 파도가 꾸준히 치는 곳과 파도가 닿지 않는 바위에 서식하는 종이 많지 않았다. 반면 교란 빈도가 평균인 두 곳 사이에서는 종의 다양성이 높게 나타났다. 저자는 이런 종의 다양성에 주목하며 '중간교란가설(중간 수준으로 교란을 받는 서식지에서 생물 다양성이 최대가 된다는 가설)'을 설명한다.


"생태학자들은 교란이 전혀 없을 경우 패랭이우산이끼와 같은 막강한 경쟁자가 경쟁적 우위를 통해 서서히 다른 종들을 침범하다가 완전히 몰아낸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교란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면 환경에 강인한 종만이 혼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교란 빈도가 평균적인 중간 지대에서는 매우 다양한 종이 균형을 이루어 번성한다. 어느 한 종이 독점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교란이 일어나지만 안정적인 기간도 충분하기 때문에 여러 종이 연달아 자리잡을 수 있다. 군락마다 연령이 다양할수록 다양성은 극대화한다.“


중간교란가설은 초원ㆍ숲 등 다양한 생태계에서 이미 입증됐다. 미국 산림청(USFS)은 이에 근거해 화재 예방 정책을 펴기도 한다. 산불 예방 캠페인을 실시하자 숲은 단일 군락으로 변했다. 교란 주기가 지나치게 낮아져 오히려 불이 번질 가능성이 커졌다. 산불 빈도가 지나치게 높을 때는 키 작은 초목만 조금 남았다. 하지만 다양성이 극대화한 적당한 산불 주기에는 빈 공간이 모자이크처럼 생기면서 야생동물 서식지가 조성되고 숲은 건강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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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합리적 일관성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날마다 맑은 날만 지속된다면 세상은 사막이 되고 만다. 비와 눈이 내리고 바람도 불어야 풍요로운 환경을 유지할 수 있다. 균형만 유지할 수 있다면 파괴나 변조가 아닌 재생인 것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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