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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벌새의 빛'에서 '충무로의 빛'으로

최종수정 2019.11.15 07:59 기사입력 2019.11.14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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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영화의 발견, 배우 박지후

[라임라이트]'벌새의 빛'에서 '충무로의 빛'으로


삼풍백화점 사고 위령탑은 양재 시민의 숲 공원 남쪽 구석에 있다. 삼풍백화점은 강남 한복판에서 무너졌다. 그런데 왜 위령탑은 외딴 공원 모퉁이에 있을까. 삼풍백화점 자리에는 37층짜리 주상복합 빌딩이 들어섰다. 백화점이 무너져도 부동산 신화는 계속된다. 평당 3000만원의 아파트가 들어설 수 있는 땅을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위령탑 건립 당시 아파트의 자산 가치 하락이 걱정됐을 것이고….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사고는 그렇게 잊혀간다.


영화 ‘벌새’는 새로운 탐색으로 안타까운 기억을 소환한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1994년의 공기를 미학으로 승화시켜 공감대 유도에 나선다. 중심에 은희(박지후)가 있다. 평범한 중학교 2학년 학생처럼 보이지만 불신, 억압, 좌절, 단절에 치여 비틀거린다. 가족과 친구들은 성장통으로 치부한다. 그만큼 익숙하게 여겨 위태롭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은희가 가장 작은 조류인 벌새로 상징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많게는 1초에 90회씩 퍼덕이는 날갯짓이 희미한 슬픔을 가리킨다.


[라임라이트]'벌새의 빛'에서 '충무로의 빛'으로


박지후(16)는 서늘한 기류에도 희망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실제로 은희의 분노 표출보다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를 만나 변하는 과정에 더 힘이 실었다. 박지후는 말한다.


“누구에게든 변화나 모험이 필요해요. 영지는 그 방향을 제시하고 용기를 불어넣는 은인이에요. 은희는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고요. 달라져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을 테니, 지금쯤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거예요.”


박지후는 장 피에르 다르덴ㆍ뤽 다르덴 감독의 영화 ‘로제타(1999)’에서 가능성을 확인했다. 로제타(에밀리 드켄)는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소녀. 소박한 행복을 바라지만 번번이 가난에 부딪혀 좌절한다. 결말에서 가스통을 짊어지고 나르는 표정 또한 힘겨워 보인다.

박지후는 “희망적인 얼굴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상처를 입을 때마다 불안과 반항이 동시에 나타나더라고요. 순수해 보였어요. 척박한 세상을 이겨낼 힘으로 느껴졌어요.”


[라임라이트]'벌새의 빛'에서 '충무로의 빛'으로


박지후는 에밀리 드켄보다 감정을 덜 소모한다. 은희의 삶 곳곳에 나 있는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이다 조금씩 꿈틀거린다. 차분한 연기는 스크린에서 보편적 아픔으로 나타나 동질감을 유도한다. 나아가 불안한 사회의 근원을 파악하게 한다. 은희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균열과 성수대교 붕괴라는 거대한 균열을 충돌시켜 끌어내는 새로운 기억 소환이다.


박지후의 경험은 단편영화 두 편과 잡지 광고 몇 편을 찍은 게 전부였다. 그런데 어떻게 설득력을 높일 수 있었을까. 그녀는 “카메라 밖에서도 은희를 분신처럼 여기고 아낀 덕”이라고 했다. “아픔이 차곡차곡 쌓이잖아요. 촬영할 때만 생각해선 안 되겠더라고요. 은희를 충분히 알아야 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가슴에 아픔을 하나씩 새겨 넣었어요. 김보라 감독님과 대화도 많이 나눴고요.”


[라임라이트]'벌새의 빛'에서 '충무로의 빛'으로


‘벌새’는 김보라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25년 전 경험에서 비롯된 김 감독의 조언 하나하나는 박지후에게 좋은 길잡이가 됐다.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고민할 때마다 김 감독님이 다가와 격려해주셨어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이 친해졌죠. 많이 의논해서 은희의 방향성을 잘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 감독님이 제겐 영지 같은 존재였죠.”


김 감독은 박지후를 ‘벌새의 빛’이라고 부른다. 다른 작품에서도 그렇게 불릴 것이다. 올해 충무로가 발굴한 최고의 배우이기 때문이다. 좋은 배우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도 발견된다.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습관이 바로 그것이다. 박지후는 “연기만을 위해서가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세상을 알아가는 데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더라고요. 아직 배울 게 많아요.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보고 그려내고 싶어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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