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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지영이를 보는 유미...작은 희망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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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 정유미

[라임라이트]지영이를 보는 유미...작은 희망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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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진공청소기. 전원을 끄고 집안을 정리하면 설거지통에 쌓인 식기와 가지런히 널린 빨래가 기다린다. 후딱 해치우고 싶지만 집중할 수 없다. 아이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울거나 칭얼거린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보여주는 김지영(정유미)의 일상이다.


그녀는 여유가 생길 때마다 베란다로 가서 창밖을 본다. 주황빛 노을이 드리운 산과 건물. 신달자 시인은 산문 '나를 바라보는 힘'에서 '너'라고 불렀다.

"내가 받은 한 통의 편지, 내가 쓴 엽서 한 장, 이미 그 관계가 아득해 보이는 어떤 풍경, 내가 도달하려는 목적지,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 하나, 내가 업으로 생각하는 '일'도 한마디로 '너'다. (...) 마음이 흐느끼고 어깨가 출렁이는데 눈은 마를 때가 많다. 그래서 강물을 바라본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본다. 그래서 허공을 바라본다. 그래서 능선을 바라본다. 바라봄이 울음을 가능케 함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에게도 건네지 못하는 말이 거기에 흐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흐름 속에 마른 내 시가 흐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모두 무상으로 주어진다. 오직 나 하나 존재함으로써 얻는 무한한 위로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 '너'가 존재하므로 '나'를 바라보는 힘이 솟구친다.


김지영은 처음에 노을빛 하늘을 보잘것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눈부신 진실 앞에서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힘을 얻는다. 인고의 시간을 반추해 마주하는 작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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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미는 이 기운이 김지영이 마지막으로 창밖을 응시하는 신에 담기길 소망했다. 단순한 미소보다 뒷모습에서 밝은 기운이 소르르 새어 나오길 바랐다.


"창밖을 보는 장면들이 장소는 물론 동선, 샷 구성까지 비슷해요. 그렇다고 구분이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초반이나 중반에는 육아와 가사로 온전히 시간을 보내고 베란다로 이동해서 지친 느낌이 나거든요. 마음 내키는 대로 바깥 풍경을 보는 듯하죠. 마지막 장면을 연기할 때는 마음가짐을 달리했어요. 주체적 존재의 자유로운 기운을 자연스럽게 부여하려고 했죠."


마음 따라 그대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마음은 믿기 어렵다. 쉽게 흔들리고 공정한 도덕을 벗어날 때도 많다. 가슴 속에 공정한 관찰자가 박혀 있는 이성적 인간과 거리가 멀다. 허망한 공상에 스스로를 맡겨 버려 빈손으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정유미는 카메라 앞에서 감상이나 우수에 젖지 않았다. 헛된 망상을 거부하고 차분히 자신을 돌아봤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를 그대로 바라보는 순간이 있었어요. 너무나 감사했죠. 저는 물론 주변까지 두루 살필 수 있었거든요. 특히 가족이요. 그래서 이 영화의 희망적인 결말이 따뜻하게 다가왔어요. 동명 소설의 결말을 따랐다면 서글펐을 거예요. '괜찮아, 잘 될 거야' 같은 단순한 말로 결론을 내지도 않아요. 지쳐있는 김지영을 보드라운 손길로 다독여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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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그린 위로는 한국 영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감정의 남발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과 감정, 현실과 감정 사이에서 지난 시간은 진폭이 큰 파도처럼 대책 없이 떨어져 내린다. 신달자 시인은 "감정을 흘러가는 대로 두면 결국 남는 것이 없다"라고 썼다.


"감정 낭비는 피로와 자책만 남긴다. 한량없이 배고프고 초라한 것이 감정이다. 적당량의 감정은 에너지가 되지만 과다하면 붕괴한다. 늘 우울한 낮과 밤, 늘 위태롭기만 했던 외로움은 감정이 자생시킨 쓸모없는 지병이었을 것이다."


김지영이 어머니(김미경), 외할머니(예수정) 등의 목소리를 내는 원인도 다르지 않다. 본질조차 알 수 없는 감정과 싸우던 시간의 절반이라도 실체를 찾는 일에 쏟았더라면 스스로를 보호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을 더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유미는 "김지영은 과거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정리할 시간이 없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그것이 알게 모르게 마음에 쌓인 듯해요. 어떤 기억은 그냥 잊히기도 하죠. 그러나 가슴 속 어딘가에 남아서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올 수 있어요. 단순히 '아프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에 기대어 발현될 수도 있어요. 많은 관객이 '빙의'라고 표현하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해야만 표현할 수 있는 아픔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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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와 육아의 책임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돌리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 불평등, 억압은 아직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별 분업이 구조화하면서 생겨난 문제이기 때문에 사회가 구조적으로 변해야 해결될 수 있다. 실마리는 남성과 여성의 대결적 시각이 아니라 여성의 따스한 시각으로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며 존중하는 건강한 사회 실현에 있다.


정유미는 이번 영화를 촬영하며 그 중요성을 여실히 느꼈다. 그는 결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의 미덕으로 충돌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것이 스스로를 발전시킬 든든한 자산이라고 믿는다.


"영화에 나오는 내용들은 결혼 생활의 일부여요. 김지영처럼 힘들어하는 여성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도 많을 테니까요. 우울한 날이 있으면, 즐거운 날도 있는 법이죠. 김지영의 미래도 점점 밝아질 거예요. 딸 아영(강별)이도 부쩍 크겠지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변하고 있어요. 우리 사회 또한 분명 나아지고 있고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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