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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지리적 집적에 대한 또 다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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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이 되면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지역 내 '○○단지 개발' '○○특구 유치'와 같은 사업 공약을 흔히 볼 수 있다. 무엇이든 특정 지역 안에 몰아넣고 밀집화와 대형화를 추구하면 주변 환경이 개선되고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듯하다. 물론 성공적인 사례도 적지 않다. 대표적 모범 사례인 미국의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는 지리적으로 밀집한 기업들 사이의 네트워크와 개방형 혁신으로 성공적인 산업 집적 단지의 대명사가 됐다. 특히 실리콘밸리 내 구성원들이 일부 경쟁 관계임에도 상호 밀접한 협력과 소통을 통해 혁신을 달성하며 산업 클러스터로서의 장점을 극대화했다는 것이 높이 평가받는 점이다.


그런데 외형상 실리콘밸리와 유사한 보스턴(Boston)의 '루트(Route)128'은 실리콘밸리와는 다른,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같은 ICT산업에서 동일한 형태를 띠는 집적 단지의 성패가 갈린 이유는 무엇일까? 실리콘밸리와 달리 루트128은 대량 생산을 지향하는 위계적 조직 구조에, 기술 독점과 영업 비밀 보안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정보와 지식의 확산이 제한됨에 따라 환경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처럼 물리적으로 밀집해 있다고 항상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클러스터 내부의 실제 업무 프로세스와 지향점, 운영 철학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도시 지역학자 스티븐 코언(Stephen S Cohen)도 특정 지역이 발전하는 것은 경제 참여자의 혁신을 창출하는 행동, 시장 프로세스를 형성하는 정치와 제도, 그리고 그 수용력에 기인한다고 밝혀 물리적 요인보다 무형의 시스템적 요인이 중요함을 시사한 바 있다.

과거 한국을 포함한 일부 개발도상국은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의 중흥을 위해 특정 지역에 산업 밀집 단지를 구축하고 집중적 투자와 개발을 통해 압축적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통신, 교통, 운송 인프라가 발달하고 디지털 기술이 혁명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특정 지역 집중화를 기반으로 한 발전 모델은 그 효과와 중요성이 과거보다 다소 낮아졌다고 판단된다. 물론 지리적 집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효율이 발생할 가능성은 여전히 일정 수준 유효하다. 하지만 시장 기반이 탄탄하지 않아 해당 산업이 쇠퇴하면 지역 경제와 지역민의 삶이 일시에 황폐화되면서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거나, 정치인이 대형 업무 단지를 유치하겠고 공언하고 주택을 먼저 건설했으나 장기간 약속이 이행되지 않아 일대가 '베드타운'으로 묶이는 등 부작용의 위험도 존재한다.


이미 국내외 선도적 기업에서 클라우드 컴퓨팅과 화상 회의 시스템, 모바일 인트라넷 등의 활용이 보편화되고 글로벌 가상 조직(Virtual Organization)까지 생기면서, 지리적 분산과 객체 간 원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또 생산 기지를 사업 부문에 따라 해외로 오프쇼어링(Offshoring)하거나 일정 프로세스를 아웃소싱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지리적 집적성이 과거만큼 중요하지는 않음을 조심스레 유추할 수 있다.


되짚어보면 사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근접이나 밀집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한 구성원 간의 실질적인 협력, 지식 공유를 통한 혁신 그리고 이것을 이끌어낼 탁월한 리더십이다. 이제 지리적 집적 사업을 바라보는 시각은 기존의 관성에 머물지 않고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변화에 부합하도록 그 개념과 기대 수준이 일부 조정돼야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각종 집적 단지를 추진하는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하기보다는, 그 실현 가능성과 기대 효과를 꼼꼼히 짚어보는 균형 잡힌 시선도 필요하다.

정훈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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