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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5] 오르세 미술관 시계 뒤편 그늘에서

최종수정 2019.03.22 09:41 기사입력 2019.03.2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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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

윤재웅

루브르 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오르세 미술관은 파리의 3대 미술관입니다. 루브르가 1848년 이전의 작품을, 퐁피두센터 내의 국립현대미술관이 1914년 이후의 작품을 전시한다면, 오르세는 그 중간 시기인 1848년부터 1914년 사이의 작품을 전시합니다. 그래서 루브르를 먼저 보고 오르세를 본 다음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하면 유럽 미술사를 시대순으로 관통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대가 미술을 사랑하는 파리의 나그네라면 저는 이런 순서를 권합니다.


오르세 미술관은 건물이 이색적입니다. 처음엔 기차역이었지요. 건물의 정면 외벽 중앙 상층부에 ‘Paris-Orleans’이라는 표기가 있습니다. ‘파리에서 오를레앙을 운행하는 기차역’이란 표지(標識)입니다. 오를레앙은 파리 남서쪽으로 130km쯤 떨어져 있는 중소 도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7~1453) 때 17세 소녀 잔다르크가 맹활약했던 곳입니다. 그녀를 ‘오를레앙의 소녀’라 부르는 이유도 영국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프랑스군을 구하고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 때문이지요. 오르세 미술관 외벽에 지금도 의연하게 붙어 있는 오를레앙이라는 이름. 구국 소녀 잔다르크의 도시로 가는 기착역이라는 증표입니다.

‘Paris-Orleans’ 표기 위에 커다란 시계가 있습니다. 이름은 ‘빅토르 라루 Victor Laloux’. 건축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기차역의 핵심 기능은 만인이 보는 정확한 출발 시간.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기계장치가 바로 시계입니다. 기차역을 설계한 건축가가 기차역의 시계가 되어 ‘만인의 기준’으로 살아가는군요. 이 시계는 바탕이 유리여서 창문 겸 전망대가 됩니다. 직경이 사람 신장보다 서너 배는 큰 유리시계 전망대. 밖은 환하고 안은 어두워 사진을 찍으면 실루엣만 나옵니다. 우리는 늘 ‘그늘족’이 되는 것이죠. 시계 뒤편의 그늘에서 보는 세상. 코앞에 센 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엔 루브르 박물관이 우아하게 앉아 있습니다.


저는 고흐, 르노아르, 모네, 마네, 밀레의 진품 앞에 서 있는 느낌을 이루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어쭙잖은 미술 감상 대신에 기차역과 시계에 대해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은 미술관이지만 과거에 철도역이었던 건물. 그 건물의 상징인 커다란 시계. 이 둘 사이의 숨은 이야기 말입니다.


볼프강 쉬벨부쉬가 쓴 『철도 여행의 역사』(1977)는 철도 여행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주목합니다. 여기에 파리-오를레앙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책에 의하면, 19세기 독일의 대표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1843년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가는 기차 노선이 개통되었을 때 무시무시한 전율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을 싣고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철도 탑승 체험이 공간에 대한 전통적인 느낌을 무너뜨린 것이지요. 그는 철도 여행을 통해서 공간이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속도가 오를수록 풍경은 시선에서 빠르게 벗어납니다. 길가의 나무들이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창밖의 사람들은 순식간에 날아갑니다. 마침내 사람의 눈은 어떤 대상도 주목하지 못하게 되지요. 눈앞에서 공간이 죽는 놀라운 경험을 하는 겁니다.

[윤재웅의 행인일기 35] 오르세 미술관 시계 뒤편 그늘에서

빠른 이동수단은 공간의 개념뿐만 아니라 시간의 개념도 뒤흔듭니다. 시간을 수치적으로 정확히 계산하는 계량적 시간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황진이가 시조를 읊던 옛날에는 동짓날 밤 시간의 길이를 ‘동짓달 긴긴 밤을’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서울의 위도를 기준으로 14시간 27분이라고 합니다. 개인의 느낌보다는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표준 수치가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지요.


사람의 느낌과 경험으로 구성되는 시간을 질적 시간, 엄정한 물리적 분할로 이루어진 시간을 양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시계는 양적 시간을 위한 발명품이지요. ‘기차는 해 뜰 때 떠나네.’가 아니라, ‘기차는 7시에 떠나네.’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갑니다. 시간이 신(神)인 시대. 정확한 분할과 계산된 효율이 사람의 느낌이나 경험에 앞서는 시대. 양적 시간에만 휘둘려 살면 우리는 시간의 영원한 노예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삶의 중요한 기준이 시계가 만들어내는 시간이라면, 우리는 정녕 자기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간의 명령에 따라야 하니까요. 우리는 시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오르세 미술관에 오니 작품 감상보다 시간과 시계에 대한 사념이 나그네를 사로잡습니다. 저는 커다란 시계 뒤편 그늘에 서서 창밖의 센 강을 바라보며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는 중입니다. 기계장치에 지배당하지 않는 마음의 순수한 질적 시간 말입니다. 촌음을 아껴가며 질주하는 양적 시간의 나라에서 저는 이방인처럼 추방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안주하는 노예의 삶보다 길 떠나는 주인의 삶을 선택하겠습니다. 지금 몇 시입니까?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요? 중요한 건 이런 질문이 아닙니다. 바로 이 순간,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흐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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