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Encounter]강민 시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백두에 머리를 두고/강민 지음/창비

백두에 머리를 두고/강민 지음/창비

AD
원본보기 아이콘

“백두에 머리를 두고/한라에 다리를 뻗고 눕는다/강산은 여전히 아름답고/바람은 싱그러운데/배꼽에 묻힌 지뢰와/허리를 옥죄는 유자철선(有刺鐵線)이 아프다/하초에서 흐르는 물 흐름이 운다/여전히 편치 않은 지리의 눈물을 받아/섬진의 노을은 오늘도 핏빛이다//(중략)//아, 저 길/아득히 먼 고구려의 꿈/멀고 먼 백두로의 그리움/머리는 여전히 아프고 아프구나” ( 「꿈앓이」 부분)


강민 시인이 최근 시선집 『백두에 머리를 두고』를 펴냈다. 1962년 등단해 시력(詩歷) 환갑을 바라보며 구순으로 가는 나이에 펴낸 이 시선집에는 4부로 나눠 98편의 시를 싣고 있다.

강 시인은 문단에선 술 한 번 밥 한 끼 안 얻어 먹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걸어 다니는 한국문단사’로 불릴 정도로 선배 잘 모시고 후배 잘 챙기는 마당발이다. 무엇보다 진보며 보수, 학벌이나 지연 등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순정한 인간성으로 다들 감싸안은 도저한 휴머니스트다. 이번 시선집을 기획한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발문에서 그런 강 시인의 삶과 시세계를 지사적(志士的) 심성을 늘 간직하고 살아온 서정(抒情)과 우국(憂國)의 적절한 조화라고 평했다.


시선집 표제시로 볼 수 있는 위 「꿈앓이」를 보시라. 민족과 나라를 걱정하는 시인과 우리 국토가 그대로 한 몸이 된 시 아닌가. 맨살 맨 마음이 살 부비는 가장 구체적인 촉감으로 끊어진 한반도와 한 몸이 돼가고 있는 시. “아, 저 길”이라 한탄하며 “아득히 먼 고구려의 꿈/멀고 먼 백두로의 그리움”을 앓고 있지 않은가.


이 분단시대의 아픔과 저 북방을 향한 꿈과 그리움은 시인에게 제목처럼 단순한 ‘꿈앓이’만은 아니다. 6.25와 4.19, 그리고 5.16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 시대를 온몸과 양심으로 겪어낸 생생한 체험에서 우러난 것임을 편편의 시들은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겨울의 이야기다/“머릿수나 채워야지.”/그때 배추와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만나/광장으로 갔다/그냥 집에서 죽치고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고/피가 끓어서 광장으로 나갔다/이윽고 켜지는 촛불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시 「광장에서」 시작 부분이다. 부제 ‘2017년 겨울’이 말해주듯 지지난 겨울 촛불혁명을 소재로 한 시다. 그때 80대 중반 나이에도 집에 있으면 뭔가 죄짓는 것 같아서, 피가 끓어서 나갔다는 솔직한 고백처럼 이념이 아니라 온몸의 양심, 죄책감에서 우러난 시여서 그대로 가슴에 직격해 들어온다.


강민 시인은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공군사관학교를 중퇴하고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학원', '주부생활' 등 잡지사를 비롯한 출판계에서 오래 일했다. 1962년 '자유문학'에 시 '노래'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63년 시 동인지 '현실' 과 드라마 동인 '네오 드라마'에 참여했다.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 공동시화집 '꽃, 파도, 세월' 등이 있다. 동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펜문학상 등을 받았다. 사진=김이하 시인

강민 시인은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공군사관학교를 중퇴하고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학원', '주부생활' 등 잡지사를 비롯한 출판계에서 오래 일했다. 1962년 '자유문학'에 시 '노래'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63년 시 동인지 '현실' 과 드라마 동인 '네오 드라마'에 참여했다. 시집 '물은 하나 되어 흐르네', '기다림에도 색깔이 있나보다', '미로(迷路)에서', '외포리의 갈매기', 공동시화집 '꽃, 파도, 세월' 등이 있다. 동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펜문학상 등을 받았다. 사진=김이하 시인

원본보기 아이콘

등단 이듬해인 1963년 강 시인은 김수영, 신동문, 고은 시인 등과 함께 시동인 ‘현실’을 결성해 현실을 직시하는 창작활동을 펼쳤다. 5.16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현실’이란 의식적인 타이틀을 내건 사람이 강 시인이다. 1974년 진보적 문학단체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 전신) 결성에도 적극 참여한 이래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며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고 있다.


“이 황무지, 사막의 유목민들은 모두 어디 갔나/갈증을 풀던 그늘, 오아시스는 또 어디 갔나/문득 거기 찻집 <귀천>이 보인다/혀 짧은 소리로 부르던 천상병,/그의 부인 목순옥,/허름한 옷차림에 허름한 바랑 짊어진 민병산 선생,/4·19의 뛰어난 시인이며 그의 절친한 친구 신동문,/삐딱한 헌팅모, 멋진 홈스팡 영국풍 신사 차림의/방송작가 박이엽,/그이들이 거기 앉아 있다/(중략)/다시 한 세월은 가고/나는 또 그리운 이들을 찾아 이 거리를 헤맬 것이다”(「인사동 아리랑 7-유목민 이야기」 부분).


연작시 「인사동 아리랑」 중 한 대목이다. 해방 직후 중학시절부터 강 시인은 인사동 끝머리 탑골공원 옆에 있던 시립도서관에 다니며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전후 폐허에서 문화 예술계의 아지트 구실을 했던 명동 시대, 1960년대의 관철동 시대를 거쳐 1960년대 말부터 열린 인사동 시대 초창기 멤버가 강 시인이다.


그 인사동에서 시인은 위 시에 거명한 천상병, 민병산, 신동문, 박이엽 등 숱한 시인묵객들을 만나왔다. 반세기 훌쩍 넘어 오늘도 인사동에서 신경림, 구중서 시인 등 숱한 동반자들을 만나고 있다.


“참으로 긴 세월의 고개를 넘어왔구나/굽이굽이 팔십굽이/험하고 눈물 많던 고개, 고갯길/한 많던 굽이길, 가시밭길/그 길을 이렇게 쉽게 넘다니……/그 많던 동반(同伴)들/아리고 아픈 내 사랑, 불꽃노을에 타버린/아리고 아픈 내 사랑/따뜻했던 피붙이, 그 친구, 그 여인들/이제는 손 놓고 떠난 이들/그 문 들어서 이제는 꿈의 본향 찾았는가//(중략)//남은 세월 또 얼마나 남았는가/산수령을 넘는다/친구여, 동반자여, 노을 속 사랑하는 이여/식어가는 손길이나마 잡고 가자” (「산수령(傘壽嶺)을 넘는다」 부분)


팔순 고개를 넘어가며 쓴 이 시 참 아리고도 의연하다. 아픈 사랑, 친구들, 여인들, 피붙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무엇보다 자신의 노령에 대한 회한이 짙게 배 있다. 그런데도 따뜻하다. 동반자들에게 식어가는 손길이나마 잡고가자는 시인의 순정은 여직 뜨겁다.


손잡고 산수령을 넘어가는 곳, “꿈의 본향”은 어디일런가. 아, 슬프게도 저승극락일 것이다. 아니다, 시인과 동반자들이 애써 가꾸려했던 이승의 낙토일 것이다. 아니, 그런 것들을 모두 껴안고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순열한 첫 마음의 본향, 순정한 혁명주의자의 그리움 그 자체일 것이다.


“끊임없이 학대받으면서도/사철의 험한 길 이기고 돌아와/여전히 푸르고 싱싱한 저 숲에 가/오늘은 눕고 싶다/누워서 나 또한 한낱 자연이고 싶다/눈감고 누워서 먼저 가신 이들의/쓰라린 사연/그리운 모습 그리며/조용히 울고 싶다” (「오늘은」 부분)


숲에 가 누워 한낱 자연이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한 시다. 그러나 시인의 그 숲, 자연은 자연 그대로가 아니라 왜곡된 우리 현대사의 쓰라린 사연이 묻어있다. 오로지 민주의 불씨 되찾아 푸르고 싱싱한 세상을 가꾸려다 쓰러진 쓰라린 사연들이 시인의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 ‘그리움’이 되고 있다.


인간다운 세상, 인간다운 인간, 인간성을 향한 그리움이 그대로 순정한 혁명을 향하는 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의리도 지조도 인정도 없고, 하여 그리움도 잃어가는 이 무잡한 세상에 순정한 혁명정신이 뭔가를 솔직하고 의연하게 보여주는 시선집이 『백두에 머리를 두고』다.



이경철 문학평론가

이경철 문학평론가

원본보기 아이콘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국내이슈

  •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매끈한 뒤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