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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집밥의 고단함

최종수정 2020.02.12 11:38 기사입력 2016.10.2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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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집밥의 고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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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새벽 출근을 준비하는데 수상쩍은 놈이 눈길을 붙들었다. 부엌 싱크대다. 가까이 가보니 팅팅 불은 라면이 곤히 주무시고 계시는 거다. 계란까지 먹음직스럽게 푼 모습 그대로. 젓가락질 한번 당하지 않은 깨끗한 상태로. '누가 라면을 끓여놓고 먹지 않았지?'

궁금증은 출근 후에 풀렸다. '싱크대에 라면이 있더라'는 문자를 마누라에게 보내자마자 살벌한 답장이 덤벼들었다. 전날 술에 취해 퇴근해서는 라면 하나 끓여달라고 징징댔다는 둥, 계란까지 풀어 들이댔더니 이미 잠에 빠졌다는 둥, 그 '진상짓'을 기억 못할까봐 라면을 인질처럼 남겨뒀다는 둥. 그러고보니 저번에도 팅팅 불은 라면이 싱크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때도 술에 취해? 그나마 라면이어서 다행이다. 밥상 차려달라고 했다가 깜빡 잠들었으면 아오지 탄광급 눈총에 사살당했을지 모른다.
이 얘기를 들은 옆자리 동료 A가 피식 웃는다. 도긴개긴이라면서. A는 며칠전 와이프로부터 겉절이를 만들어주겠다는 다짐을 받고는 군침을 삼켰다. 소금 절인 배추를 양념에 잘 버무리면 아삭아삭하면서 달큼한 식감이 일품이다. A의 반응에 감복한 와이프는 성스러운 심정으로 겉절이를 버무리기 시작했고, 하지만 너무나 정성을 다한 나머지 몸살이 나고 말았으며, 그 바람에 A는 며칠째 외식을 하고 있고, 홀로 남은 겉절이는 이미 숙성이 되고 있다나. 그런 A에게 '와이프 마음이 얼마나 곱냐'며 위로했지만 그는 잠자코 소주잔만 기울였다.

맞벌이 집이 늘면서 집에서 음식을 해먹기가 점점 버거워지고 있다. 평일은 과중한 격무에 영혼까지 탈탈 털렸다는 이유로, 주말은 건조대 빨래처럼 늘어지고 싶다는 핑계로 중국집과 짬뽕집과 피자집과 치킨집에 전화를 돌린다. 간혹 '오늘은 내가 요리사'를 외치며 앞치마를 두르는 남자들이 등장하지만 결과는 처참하다. 양파와 감자 따위를 씻고 다듬고 칼질을 해보는데 어찌된 일인지 냄비에 들어가는 것보다 싱크대에 버려지는 게 더 많다(이런 현상은 일부 여자들에게도 나타나는 바, 성별이 아니라 타고난 성향 탓이 분명하다) 재료는 2만원어치인데 겨우 1만원어치가 냄비에서 부글부글 끓는다.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은 상차림. 그럴거면 그냥 시켜 먹지, 마누라 눈에서 또 다시 아오지 탄광급 레이저가 작렬한다.

음식 전문가들의 의견을 빌리면, 서양은 주 메뉴든 사이드 메뉴든 개별적으로 맛이 완성되는 반면 우리는 밥과 찬과 국이 입 안에서 섞이면서 비로소 맛이 완결된다. 그 맛의 변화무쌍함을 위해 매 끼니 밥에 맞는 국, 국과 어울리는 반찬을 고민한다. 최근에는 이런 고단함을 덜어주는 반제품 요리가 인기인데, 그에 대해 자칭 '기적의 손맛'인 마누라의 믿거나 말거나 식 설명은 이렇다.
"반제품 요리는 3+1의 장점이 있지. 첫째는 요리 시간을 줄여주고, 둘째는 음식물 쓰레기를 절감시키고, 셋째는 장보는 시간을 절약하고. 그럼 +1은 뭐냐. 주부로서의 자기만족이랄까. 비록 반제품이지만 요리를 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고 '가족의 일체감'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외식이나 주문음식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포만감이지."

* 나라꼴이 말이 아닌데 무슨 밥타령이냐고 타박하지 마라. 세월이 하 수상하니 급격히 허기가 밀려와서 이러고 앉아 있다. 영화보다 더한 막장 현실에 우울해하면서 어떤 음식으로 상실감을 채울까 거룩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이정일 산업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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