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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터미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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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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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저는 그리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이산가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입니다. 그렇다고, 속초 '아바이 마을' 같은 곳은 아닙니다. 사할린에서 영구 귀국한 어른들의 마을도 아닙니다. 조선족 동포 집단거주지도 아닙니다. 이주 노동자 타운도 아닙니다.

 꽤 큰 마을입니다. 달동네 하나를 통째로 밀어내고 들어앉은 대단위 아파트만큼 넓습니다. 특이한 것은, 집들의 나이가 모두 제각각이란 점이지요. 언제 지었는지 모를 만큼 오래된 것들이 있는가 하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새 집들도 드문드문 보입니다.
 집주인들의 나이도 차이가 많이 납니다. 백 살 안팎의 사람들도 있고, 미성년자도 더러 있습니다. 집집마다 커다란 문패가 있어서, 주인의 성별과 나이와 종교까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벌써 십여 년 이상 이 곳을 출입하는 저는 이 마을 가가호호가 제 사는 곳 이상으로 익숙해진지 오래입니다.

 이 마을이 여느 동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열에 아홉이 일인(一人)가구라는 것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싱글'입니다. 아무래도 외롭고 쓸쓸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네에 깔리는 공기가 그다지 무겁지 않습니다. 오히려 밝고 투명합니다. 바람은 경쾌하고 햇살은 명랑합니다.

 길들이 반듯반듯하고 골목마다 비질 자국이 선명합니다. 산색(山色)이 사계를 또렷이 알려주고, 화단의 꽃들은 때맞춰 피고 집니다. 하여, 이 마을은 달력이 필요 없을 것만 같습니다. 들머리엔 소문난 약수가 있어서 물 길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공기가 좋아서 산책을 나오는 사람들과 등산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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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작 알아차리셨지요? 그렇습니다. 공원묘지입니다. 우리와 가까운 사이였다가 멀리 간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부모자식과 형제자매간, 친구지간, 사제지간, 이웃사촌간이다가 홀연히 뚝 떨어져나간 사람들. 그들이 마련한 새 주소지입니다.

 같은 국민이었다가 시민이었다가 동창이었다가 동료였다가… 예비군 훈련도 민방위 훈련도 같이 받고, 노인대학도 같이 다니다가… 인간의 마을을 벗어난 사람들. '함께'였다가 우리보다 먼저 '홀로'가 된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노래 하나가 떠오릅니다. 죽음을 참으로 애절한 업보(業報)의 가시밭길로 그리는 노래, '회심곡(回心曲)'. 저승사자가 활대같이 굽은 길로 살대같이 달려와서 거역할 수 없는 황천길로 데려가는 과정을 참으로 리얼하게 전해주지요.

 구구절절 슬픔을 동반한 공포가 우리들 남아있는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날이 오면, 일가친척도 벗님네도 아무 소용이 없고 결국은 속절없이 혼자가 되어 길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한번 다녀가는 길, 효도하고 우애하고 선한 공덕을 쌓으며 살다 가라는!

 반감(反感)이 없을 리 없습니다. 죽음을 꼭 그렇게 숙명적인 이산(離散)으로만, 하릴없는 통과의례의 관문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하는 저항감입니다. 까짓것! 서울역이나 인천공항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일로 여길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터미널에서 경험하는 숱한 이별 중에도 죽음만큼 기막히고 기약 없는 경우들이 허다하지 않던가요.

 그곳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의 한쪽 끝이 아닙니다. 천지간(天地間)을 오가는 터미널이거나 금강산이 보이는 이산가족 합동면회소 같은 곳입니다. 그렇게 부르는 순간, 그곳은 야생화 가득히 피어난 들판이나 숲속 정거장처럼 아름다운 곳이 됩니다. 벌써 많은 묘지들이 그런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지나다니는 공원묘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른바 자연장(自然葬), 수목장(樹木葬)이 변할 것 같지 않던 이 동네의 모습을 바꿔놓고 있습니다. 주거의 개념과 디자인의 변화는 이제 산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택(幽宅)은 이제 하늘 보고 누운 자의 영어(囹圄)가 아니라 우리가 부르면 언제든 팔 벌리고 달려 나오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처소입니다.

 만남의 광장을 품은 천연의 호텔. 인간 최후의 주거는 그것이 마땅한 선택입니다. 풀과 꽃과 나무들, 바람과 별과 함께 사는 집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비로소 우주대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집 우(宇)+집 주(宙)! 우주가 어째서 한 채의 집인지 알게 됩니다.

 제 시 한 편을 보여드리고 싶어집니다. 빙모(聘母)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던 날에 쓴 것입니다. 제 아이의 외할머니가 이사 간 집, 아니 그분이 머무는 터미널 호텔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를 심었다. 꼭꼭 밟아주었다. 청주 한 병을 다 부어 주고 산을 내려왔다. 광탄면 용미리. 유명한 석불 근처다.

 봄이면 할미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졸시 '꽃을 심었다' 전문

시인· 서울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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