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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해방공간의 '거인', 몽양에 관한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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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전 오늘 피살된 '건국동맹' 여운형, 우린 그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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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몽양 선생과 꼭 결혼했을 것이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 선생과 결혼할 텐데 불행하게도 난 남자로 태어났다.”

조선의 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는 영향력 있는 조선의 지도자를 포섭해 본격적인 황국신민화 작업을 추진하기 위해 임기 내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그는 특히 몽양 여운형에 집중했다. 반일 연설로 투옥 중이던 그를 형기 만료 전에 풀어준 뒤 대규모 농장을 제공하겠다고 유혹했지만, 정작 사로잡힌 건 몽양이 아니라 우가키 총독의 사위 야노였다. 저 낯간지러운 고백은 몽양을 너무도(?) 사모했던 야노의 토로로, 일본인, 중국인을 가릴 것 없이 당시 몽양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교우를 나눴던 사람이라면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를 해방정국의 소란 속에 피습당한 공산주의자로 알고 있지만, 그의 행보를 면밀히 살펴본다면 이는 큰 오해이자 오독이다. 70년 전 오늘, 혜화동 로터리에서 급작스런 피습에 눈을 감은 여운형을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 다섯 가지 키워드를 놓고 오해와 진실을 풀어보려 한다.
망아지 위에 오른 양반과 이를 끌고 있는 노비의 모습에서 신분이 엄격했던 당시 사회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망아지 위에 오른 양반과 이를 끌고 있는 노비의 모습에서 신분이 엄격했던 당시 사회 풍경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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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반

태양을 치마폭에 품는 꿈이 태몽이라 아호가 몽양인 여운형은 서인 소론 양반가에서 나고 자랐다. 신분은 양반이나 서인 집안에 동학 교도였던 탓에 형편은 가난했다고 전해지나 꼿꼿하다 못해 꼬장꼬장한 부친의 양반의식을 지켜본 몽양은 이를 반면교사 삼았다. 동네 상민(常民) 집 앵두를 따 먹고 개구멍으로 나오다 얼굴이 긁힌 그를 보고 부친이 그 길로 상민의 집에 쳐들어가 앵두나무를 찍어낸 일화를 두고 그는 깊이 미안해하는 수오지심이 있었다.
여운형이 7년간 전도사로 사역했던 승동교회는 당시 백정들이 많이 다닌다고 하여 '백정교회', 또는 '민중교회'로 불렸다.

여운형이 7년간 전도사로 사역했던 승동교회는 당시 백정들이 많이 다닌다고 하여 '백정교회', 또는 '민중교회'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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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크리스천

조부는 열렬한 동학교도였으나, 여운형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과거제가 폐지되고 신학문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는 배재학당에 입학했으나 주일예배를 빼먹고 놀러 다니다 학교까지 옮길 만큼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이내 밖으로는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등 서구열강이 조선을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안으로는 조부와 부친의 죽음으로 가장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상황이 되자 그는 일련의 방황을 정리하고 신학문을 받아들여 개신교에 입교하며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제사를 없앴다. 이때 해방시킨 노비가 후일 그를 찾아와 반말로 대들자 태연히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너희들이 받았구나!”라 답할 만큼 깨인 사람이었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앞줄 가운데가 안창호, 맨뒷쪽 2번째가 여운형이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앞줄 가운데가 안창호, 맨뒷쪽 2번째가 여운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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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산주의자

선교사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중국 금릉 대학으로 유학 간 몽양은 윌슨 미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명받아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훤칠한 키, 준수한 외모, 비상한 두뇌와 상대를 배려하는 화술은 요즘 말로 ‘사기캐(사기 수준으로 비현실적인 캐릭터 또는 사람)’의 전형이었던 그는 그런 재주를 바탕으로 신한청년당, 임시정부, 고려공산당 등에 몸담으며 중국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펼쳤다. 상해에서 창당한 중국 공산당의 초기 요인들인 모택동, 쑨원, 호찌민을 만나 교유하며 공산당 활동을 펼쳤으나 얼마 안 가 일본 경찰에 체포, 국내로 압송되면서 공산당 활동보다는 출옥 후 언론사를 경영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고, 해방 직전에는 ‘건국동맹’을 결성,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었다. 이후 그의 행보를 살펴보면 중도 좌익적 성향을 띤 활동을 주로 펼치는데, 본인을 공산주의자냐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 바 있다.

"노동자 농민 일반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공산주의자로 되겠다. 노동대중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 만일 우익이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이론을 나는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

해방직후 여운형을 담은 영상, 이때 여운형은 60세였다. 사진 = KBS 영상실록 화면 캡쳐

해방직후 여운형을 담은 영상, 이때 여운형은 60세였다. 사진 = KBS 영상실록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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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람둥이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시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그에게는 여인과의 염문이 늘상 함께했다. 14살에 조혼한 부인은 3년 만에 임신 중 사망하고, 모친의 강권에 19세에 재혼한 아내와 일생을 함께하지만, 그는 연애결혼이 아닌 조혼으로 배우자를 만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일본인 첩에게서 막내아들을 얻었고, 이후 아들의 일본유학으로 함께 일본에 머물던 시절 유학생 진옥출과 연을 맺어 막내딸을 얻은 사실은 한국 근대사의 연애 상에 비춰볼 때 크게 흉이 될 일은 아니었으나, 민족 지도자의 추문으로 해방 이후 좌우합작 운동에 힘쓰던 그의 발목을 잡는 스캔들이 되었다. 잘난 외모와 빼어난 스펙, 그리고 한시도 몸을 가만두지 못하는 성정의 남성이 혼란의 시대를 살아내며 자행한 실수 아닌 실수는 인생에 있어서 귀한 자녀로, 지도자의 삶에 있어 오점으로 남았다.

1947년 7월 서재필 박사 귀국 당시. 왼쪽 김규식, 가운데 서재필, 오른쪽 여운형.

1947년 7월 서재필 박사 귀국 당시. 왼쪽 김규식, 가운데 서재필, 오른쪽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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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설가

그는 뛰어난 대중연설 능력을 갖고 있었다. 중국유학 전, 민중교회였던 승동교회에서 전도사로 7년간 사역하면서 그의 설교를 듣고자 모인 신자의 수가 4,000명에 육박했다. 한일강제병합을 앞두고 이를 비판하는 연단에 연사로 나선 그의 외침을 들은 청중 중 일진회 소속의 한 군수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는 일화가 있다. 1919년 일본 방문 당시 일본 장관들과 내외신 인사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그는 조선 독립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설득하는 연설을 통해 ‘교양있고 존경할 만한 인격’이라는 당시 도쿄제국대학 법학과 교수의 극찬을 듣는 등 뛰어난 외교 실력을 발휘했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이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세계는 약소민족해방, 부인해방, 노동자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 1919년 11월 28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실린 여운형의 연설


해방 후 남과 북으로 나뉜 혼란 속의 대한민국에서 소련과 미국은 그를 유능하지만, 위협적인 지도자로 예의주시했다. 극단적으로 나뉜 세력 간의 분쟁 속에서 부단히 통일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말년의 행보는 테러와 암살 협박의 연속이었다. 백색 테러조직 ‘백의사(白衣社)’ 소속으로 추정되는 19세 소년 한지근의 총탄에 그는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미소를 띤 얼굴로 눈을 감았다.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안도할 수 있다고 느껴서였을까, 미소 띤 그의 마지막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뒤 18년 뒤인 1965년 7월 19일 하와이로 망명한 일생의 숙적, 이승만 대통령도 눈을 감았다. 조국 해방의 동지이자, 분단 조국의 숙적이 같은 날 제사상을 받는다니.... 그리고 여전히 남과 북은 강대국의 보이지 않는 손과 함께 갈라서있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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