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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눈] 장충체육관이 돌아온다

최종수정 2014.12.18 11:10 기사입력 2014.12.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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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환 중앙대 교수

손환 중앙대 교수


[아시아경제 ]“전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장충체육관입니다”라는 라디오나 TV 아나운서의 박진감 넘치는 멘트는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하루 일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 국민들의 피로회복제였다. '박치기 왕' 김일의 프로레슬링, 한국 첫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된 김기수의 타이틀 매치, 초대 천하장사에 오른 민속씨름대회의 이만기, '오빠부대'를 이끌고 다닌 농구대잔치, 서커스 공연, MBC 대학가요제,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식과 체육관 선거 등 우리나라의 스포츠와 문화, 그리고 정치적 공간으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장충체육관. 이 장충체육관이 2015년 1월 문화복합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연다. 시설의 노후에 따른 안전문제, 협소한 공간 등의 이유로 2012년 6월 리 모델링 공사에 착수한지 2년 7개월 만이다.
장충체육관은 6.25전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물지도 않은 1955년 6월 23일 육군체육관으로 시작되었다. 국방부가 우리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장충단공원에 육군체육관을 건립하였다. 약 10,000평의 규모에 농구장 두 면을 설치하고 그 외 여러 종목의 경기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약 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야간경기가 가능한 획기적인 체육관이었다. 이후 육군체육관에서는 국내외 농구대회, 프로복싱대회, 체조대회, 레슬링대회, 국군 농구·배구대회, 씨름, 그네대회, 당수도 연무대회 등 각종 경기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1959년 8월 갑자기 육군에서는 육군체육관을 서울시에 이관하는 것을 결정하였다. 군 당국의 이러한 조치는 과거 후생사업의 대상으로 되어 있던 육군체육관을 당시 육군 정병감인 김근배 준장이 1959년 7월 정부공금 3,147환(현재 약 1,260만원)을 횡령하여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사건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육군은 육군체육관 운영에 대한 재검토를 한 끝에 군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기존에 국방부가 관리하고 있던 육군체육관을 1959년 말 서울시에 넘기기로 하였던 것이다.
1962년 12월 31일 서울시 중구 장충동 2가 산 42에 한국스포츠사의 기념비적인 건물이 들어섰는데 그 건물이 장충체육관이다. 1960년 3월 16일에 착공하여 약 2년 9개월간의 공사 끝에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야간이나 우천, 겨울에 정상적인 스포츠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시절 시간이나 날씨,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1년 내내 경기가 가능한 국내 최초의 실내경기장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장충체육관은 필리핀의 도움을 받아서 지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은 새로운 건축구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 시도한 건축가 김정수의 디자인 설계와 최종완의 구조설계, 그리고 삼부토건의 시공으로 건설되었다.
장충체육관의 개관은 당시 대단한 뉴스였는데 그때의 신문 기사를 보면 “장충체육관 개관을 축하한다는 제목 하에 우리나라 최대 실내경기장인데 농구, 권투, 탁구, 배구 등이 주야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열리게 됐다”고 하였으며, 또한 사설에서는 “개관을 계기로 후진성에서 벗어나 스포츠 한국의 이름을 널리 떨치자”는 희망도 피력하였다. 그 후 반세기의 세월 속에서 한국스포츠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국제스포츠무대에서 스포츠강국으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장충체육관은 1979년 4월 잠실체육관이 준공되기 전까지 다목적 체육관으로서의 기능을 해오며 한국 실내스포츠의 유일한 메카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때는 유도와 태권도(시범종목) 경기가 열렸고 프로농구와 프로배구, 각종행사 등을 유치하여 서울의 스포츠문화 명소로서 자리매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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