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차별..다른 학문과의 괴리 심각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인문학의 위기는 이미 오래된 담론이다. 지난 1996년 국공립대 인문대 학장들이 발표한 '인문학 제주선언', 2001년 국공립대 인문대협의회가 발표한 '2001인문학 선언', 2006년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과 80여개 대학 인문대 학장들이 내놓은 '오늘의 인문학을 위한 우리의 제언' 등 위기에 대한 논의는 간단 없이 이어졌다. 급기야 지난해 10월 인문학자들은 '한국인문학총연합회'를 결성하면서 또다시 내놓은 '인문학 선언문'은 거의 비명에 가깝다.
인문학의 위기는 현대사회의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압살당한 데는 심각한 학문 차별도 한몫 한다. 최근 인문학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거세다. 인문학계는 "대학에서 인문학 기피 풍조는 더욱 만연하고 있으며 폐지 위기에 놓인 학과들도 더욱 늘었다"며 "학문간 불균형, 문화 중흥을 위해 인문학을 새롭게 돌아봐야 할 시기"라며 인문학 부흥을 부르짖고 있다.
◇ 인문학 차별 심각=10일 2012년 정부의 학문별 지원 현황을 살펴보면 인문사회 분야의 1인당 연구비 및 점유율은 ▲ 인문학 904만원, 2.5% ▲ 사회과학 1278만원, 5.3% ▲ 복합학 771만원, 0.9% ▲ 예술체육학 588만원, 0.9%에 그쳤다. 반면 이공분야는 ▲ 자연과학 1억675만원, 21.1% ▲ 공학 1억2534만원, 48.2% ▲ 의약학 4026만원, 15.6% ▲ 농수해양학 1억1418만원, 5.4%를 차지하고 있다. 연구비 점유율은 전체 학문 중 인문사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9.7%로 지극히 낮은 편이다. 인문학이 다른 학문 분야와의 괴리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위행복 한양대 교수는 "올해 인문학 연구 관련 예산은 총 1604억원 규모로 지난해보다 약간 늘어나긴 했으나 R&D 투자가 15조원을 넘는 것을 감안하면 지극히 낮은 수준"이라며 "학문간 불균형을 해소하는데 국가와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인문학에 대한 외면은 국가 학문진흥정책만이 아니다. 26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을 관장하는 '경제ㆍ인문사회연구회' 내에는 '인문'이라는 명칭만 남아 있을 뿐 인문학 관련 연구기관은 전무하다. 올해 들어 교육부는 직제 개편 당시 '학술인문과'를 '학술진흥과'로 개편, 인문 명칭마저 아예 지워 버렸다. 이처럼 인문분야를 포괄하는 정책 기획 전담 기구는 물론 정책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과학기술분야와는 현격한 차이다.
이와 관련, 위 교수는 "인문학계는 지난 10여년동안 과학기술법 수준의 '인문기본법' 제정을 요구해 왔다"며 "인문학이 국가사회 발전 및 국민 삶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인문전담기구' 등을 설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문학계는 인문기본법 제정 및 인문진흥원(가칭) 등의 설립을 목청껏 부르짖는 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 인문학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현재 인문학 위기감은 극에 달한 상황이다. 인문학은 존립을 넘어 몰락 직전이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가 곧 삶의 위기'라고 설파한 들 소생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본래 인문학은 문학, 철학, 예술 및 역사, 인류가 창안에 각종 제도 및 사회적 규범을 포함한다. 즉 인간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느냐를 다루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아주 오래된 '인류 지식의 고고학'이다. 그러나 근세 이후 인문학은 정신적ㆍ지적ㆍ예술적 산물로 제한되면서 자연과학과 분리되고, 최근엔 사회과학과도 별개로 취급 당하는 처지다. 모든 학문의 근원을 이루던 시대는 가고, 이제 낡은 학문으로 전락해 최소한의 역할도 하지 못 한다.
심지어는 인문 관련 일반 교양서적은 물론 전문적인 인문학서적마저 외면 당하면서 인문학자의 글쓰기도 학술지 게재를 위한 논문 생산에 국한되는 실정이다. 즉 인문학이 독자들과의 소통에 실패, 사회적 추동력을 잃은 상태다. 당연히 위기는 경제 성장을 위한 응용과학 중심의 학문 정책에서 기인한다.
프랑스의 경우 국립학술원 산하의 중심 연구 분야로 다른 학문과의 융합 연구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인문예술국가기본법' 속에 인문 예술은 모든 국민에 속한다고 명문화해 '인문정신'을 국가 자산임을 천명하고 있다. 즉 차별, 무관심, 불균형 등으로 괴리를 겪는 우리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강진갑 경기대교수는 "인문학은 사회적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그 역할이 더욱 주목받는 학문"이라며 "인문학이 철학, 어문학, 예술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을 아우르면서 자연과학 등과의 융합을 부단히 시도해 인간적 감성을 다시금 일깨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강교수는 또 "문화 및 정보, 아이디어, 상상력을 요구하는 창조산업에서는 인문학이 콘텐츠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덧붙였다.
인문학의 몰락은 지난 수십년 동안 경제 성장을 우선 과제로 삼은데서 비롯됐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가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문화경쟁력이 국가경쟁력으로 부상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된다. 이에 인문학계는 인문학을 고사되지 않도록 종합적인 진흥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 인문학, 치유 기능을 회복해야=그렇다면 인문학의 새로운 기능은 무엇인가 ?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이 피로사회에서 치유와 소통의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한 물질적 풍요로부터 인간 소외가 심화된 상황에서 바람직한 삶의 조화를 위해 인문학이 궁극적인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지금 세상은 화, 분노, 절망과 우울함이 들끓는다. 모두 시대가 낳은 병이다. 사람들은 범죄적 욕구와 알 수 없는 원한에 가득 차 사소한 일에도 곧잘 목숨을 건다. 작은 말싸움이 살인을 부르고, 윗집의 소음에 칼을 휘두른다.
이웃은 더욱 적대적인 관계로 변했고, 학교에서마저 왕따, 폭력이 난무한다. 보호받아야할 아이들과 여성, 노인은 더욱 사각지대로 내몰려 공포에 떨어도 누구 하나 구출하려 하지 않는다. 공권력마저 간혹 폭력으로 돌변, 인권을 압살하는 도구로 날아들기도 한다. 노동이 홀대 받고, 가난한 이들이 업신여김 당하는 세상에서 절망을 더욱 깊어졌다.
세계는 테러와 환경 파괴, 양극화, 전쟁, 기아, 폭등 등으로 울부짖음이 가득하다. 노르웨이 오슬로 캠핑장의 무차별 총격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선량하고 평범한 이들에게 가해진 '묻지마 폭력'은 세계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판국에 인문학이 버려져야 할 것인가 ? 오늘날 거대한 돌무덤으로 인간의 주검을 매장할 수 없다 해서 피라미드의 가치가 사라질 수는 없는 것처럼 그저 박물관에나 처박아 놓을 유물이 아니다. 그렇게 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여전히 인문학은 삶의 중심에 존재하며 인간의 존엄함을 일깨워줘야 할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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