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중앙銀 총재들, 시장 주무르는 스토리텔러
경제는 사람이며 말이며 생각이다
[아시아경제 조목인 기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성장해온 신흥국들이 흔들리고 있다. 연일 통화가치와 주식시장이 급락하는 등 금융시장의 혼란은 커지고 있다.
이런 대혼란은 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지난 5월 양적완화를 축소할 수 있다는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발언이 그것이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발생 당시와 달리 FRB의 금리 인상이나 일본 정부의 소비세 인상 같은 직접적인 정책 변화는 없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몰고 온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 같은 굵직한 사건도 없었다. 그럼에도 글로벌 금융시장은 FRB 의장의 말 한 마디에 울고 웃는다.
영국 경제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이처럼 '말의 효과'가 큰 것은 중앙은행의 달라진 역할과 연관 있다며 중앙은행 총재의 자질에도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고 최근 보도했다.
◆시장과 대화하는 중앙은행 총재=요즘 미국ㆍ영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의 가장 큰 화두는 시장과 적극 소통하는 것이다. 과거 중앙은행 총재에게 미래 경제에 대한 예측이나 통화정책에 대한 힌트는 금기시됐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중앙은행 총재는 뻔뻔하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시장과 적극 소통하고 자기 의견을 개진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글로벌 금융계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이른바 '선제안내(foward guidence)'다. 선제안내란 정보력 있는 중앙은행이 앞으로 어떤 통화정책을 취할지 시장에 미리 예고하는 것이다.
마크 카니 영국 중앙은행(BOE) 총재는 선제안내의 선두주자다. 그는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로 재직할 당시 선제안내를 효과적으로 정착시켰다. 지난 7월 BOE 총재로 취임한 뒤 가진 첫 통화정책 회의에서 카니는 "실업률이 7% 밑으로 내려갈 때까지 최저 수준의 금리를 유지하겠다"고 밝혀 세계가 깜짝 놀랐다. BOE 역사상 통화정책 방향을 특정 경제지표와 연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카니 총재의 의도와 달리 이후 영국 국채금리가 오르는 등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카니 총재의 선제안내는 실업률과 기준금리를 연계시킨 FRB 따라하기에 불과하다는 비아냥도 나왔다.
논란에도 선제안내는 중앙은행 총재가 '구두개입'으로 시장을 선도해 나아가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베일에 싸인 통화정책이나 가시적인 경제지표가 아니다. 대중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중앙은행 총재의 언어ㆍ행동 같은 비경제적 지표가 시장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의 바스코 커디어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중앙은행 고위 관계자들의 선제안내 발언이 양적완화 정책보다 시장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중앙은행 총재는 언어마술사=과거 중앙은행 총재는 경제라는 복잡한 기계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현실에 대해 판단하고 정책을 조정하는 일종의 엔지니어였다. 이에 따라 중앙은행 수장의 자질로 뛰어난 경제 지식, 효율적인 통화정책 수행력, 정치적 통찰력이 꼽혔다.
극심한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미 경제를 살려낸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아돌프 볼커 주니어 전 FRB 의장, 정확한 경제 판단력으로 '그린스펀 효과'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중앙은행 총재의 자질로 경제 지식과 통화정책 수행력도 중요하지만 설교자ㆍ심리학자 같은 언어적 감각과 문화적 분석력의 역할이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들의 통화정책 변화에 대해 연구한 뉴욕 주립 대학 인류학과의 더글러스 홈즈 교수는 "중앙은행 총재야말로 멋진 스토리텔러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 시대의 총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언어능력"이라며 "비논리적이라고 생각되겠지만 이는 시대 변화에 맞춘 중앙은행 총재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중앙은행 역할 변화는 시대적 요구=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한 그린스펀 전 의장의 트레이드마크는 모호함이다. 그는 무미건조하고 애매모호한 화법으로 통화정책의 조정 여지를 넓히고자 했다. 보수적이고 중립적인 중앙은행의 특성상 신비주의적 통화정책 구사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린스펀 뒤를 이은 버냉키 의장의 생각은 달랐다. 버냉키 의장은 취임 초부터 "FRB의 모호한 대화방식이 시장을 혼란시킨다"고 비난했다. 그는 직설화법, 시장과 적극적인 소통으로 중앙은행의 투명성을 강화했다.
FRB는 과거의 은둔방식에서 벗어나 언제, 어떻게 시장에 개입할지 예측가능하도록 변했다. 특히 FRB 의장은 다양한 화법으로 자기 존재를 시장에 끊임없이 각인시킨다. 세계가 '버냉키의 입'에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차기 FRB 의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재닛 옐런 부의장은 2004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연준 총재로 일하며 FRB의 이런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체감한 인물이다.
그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내의 의사소통 자체가 글로벌 금융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수단이 됐다"고 평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