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라는 질환의 파멸성을 말하다"..타니자끼 소설 '열쇠'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나는 앞으로 우리 부부의 성생활을 계속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키무라라는 자극제의 존재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주의를 주고 싶은 점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자극제로서의 이용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아내가 상당히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가도 좋다. 아슬아슬하면 할수록 좋다. 나는 나를 미치도록 질투하게 만들고 싶다. 혹시 한계를 넘어버린 것은 아닐까라고 다소 의심을 품는 정도까지도 좋다. 그 정도까지 가기를 바란다.”(소설 '열쇠' 본문 중에서)“오늘도 나는 낮 동안에 키무라와 했던 유치한 놀이 하나하나를 그대로 다시 한번 남편을 상대로 연출해보고 그와 키무라가 어떤 점에서 어떻게 다른가를 음미하며 구별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리고 낮에 즐긴 상대와 비교해 이 남자의 기술이 얼마나 졸렬한지 안타까움마저 생겼는데, 그다음에 어찌 된 일인지 결국 나는 낮에와 마찬가지로 흥분하고 말았다.” (소설 '열쇠' 본문 중에서)
타니자끼 준이찌로오(사진))의 소설 '열쇠'가 창비에서 세계문학 시리즈의 하나로 최근 출간됐다. 소설은 남편과 아내의 일기가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남편이 병으로 쓰러진 후 아내의 일기는 혼자만의 고백으로 채워진다. 소설에서 가장 큰 반전으로 이루는 대목이다. 아내는 남편이 훔쳐보았을 자신의 일기가 거짓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어 남편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리한 성관계로 병을 악화시켜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기 위한 술책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소설은 부부가 일기를 통해 서로를 훔쳐본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56세의 남편과 45세의 아내 사이에 벌어진 섹스는 본능적 욕망 혹은 평범한 생식행위를 뛰어넘는다. 관음과 질투가 게임처럼 펼쳐지는, 노골적인 '이성간 투쟁'이다. 열쇠는 여성이 도덕적 관념을 이기고 섹스 결정권을 갖게 된다는 식의 페미니즘적인 성애소설의 전형성을 따르지는 않는다.
어느 측면에서 열쇠도 남녀관계에서 결국 성 우위에 서 있는 쪽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진실을 보여주기는 한다. 그러나 그 진실은 기존 성애소설이 보여준 '여성성의 발견'과도 확연히 구별된다. 이 소설은 성 결정권이 거친 투쟁과 불투명한 인간관계속에서 획득하는 방식임을 설명한다. 성애소설에서 여성들은 결코 세상에 굴복하지 않는다. 특히 독특한 자기애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열쇠는 투쟁의 강도가 다소 격렬하고, 엽기적이며 마조히즘적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넷이다.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대학교수인 남편, 남편보다 열 한살이나 적은 아내, 부부의 자식인 딸, 남편의 제자인 키무라 등이다. 이들은 모두 '섹스'라는 질환을 앓고 있다.
남편은 중년 이후 아내의 성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항상 노심초사하며 조신한 아내와의 과감한 섹스를 꿈꾼다. 문제는 그가 질투할 때만 성 충동을 느낀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인 키무라가 아내와 사귀게 만든다. 남편은 키무라와 아내가 어느 선까지 나아갔는지 늘 궁금해하면서 그들이 마지막 선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아내와 무리한 성관계를 지속하다가 결국 쓰러지고 만다.
중년인 아내는 유교적인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나 점차 성에 눈을 뜬다. 그녀는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남편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키무라와 관계를 맺은 이후로 급속히 남편을 싫어하게 된다. 그렇다고 남편과의 관계를 마다하지도 않는다. 낮에는 키무라, 밤에는 남편과 관계를 가지며 아내는 아무런 가책이 없다. 오히려 건강하지 않은 남편을 무리한 섹스로 유도해 죽음으로 내몬다.
그들의 과년한 딸은 엄마가 키무라와 관계할 수 있도록 메신저 역할을 하거나 몰래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알선해 준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죽은 후 키무라와 형식적으로 결혼해 한 집에 살면서 엄마의 거친 성생활을 세상사람의 이목으로부터 숨겨준다.
'열쇠'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탐미적인 소설이다. 일본에서 탐미주의의 등장은 전쟁 패배와도 관련이 있다. 전후 일본은 전통적 가족이 붕괴되고, 현대사회에 이르러 성 소비 또한 그런 바탕 위에서 이뤄졌다. 때문에 1956년 열쇠는 소설 연재가 시작되자마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타니자끼 준이찌로오는 이 작품을 70세에 발표했다. 타니자끼 준이찌로오는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886년 일본 토오꾜오 니혼바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부터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0년 단편 '문신'을 발표하며 일약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다. 50여년간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였으며 '세설(細雪)'로 마이니찌출판문화상과 아사히문화상을, '미치광이 노인의 일기'로 마이니찌예술상을 받았다.
<'열쇠'/타니자끼 준이찌로오 지음/이한정 옮김/창비 출간/값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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