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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미국의 30달러 원조가 이병철·구인회 밑거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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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원조금 배당·입찰로 환차익···대충자금, 축재 토대
-제분·제당·시멘트·방직 '4대 광맥' 산업 거대 자본 형성
-무역업 활기·적산불하·전쟁 복구 건설경기 호황도 한몫


호암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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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피난살이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전쟁은 인구의 대이동을 불러왔다. 전쟁 이전인 1949년과 전쟁 이후인 1955년도 3대 도시의 인구를 비교해보면, 서울은 144만여 명에서 156만여명으로 겨우 12만명 정도가 늘었을 뿐이다. 그에 반해 부산은 47만여명이 104만여명으로 곱절 이상 늘었으며, 대구는 31만여명이 45만여명으로 50% 가까운 증가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 서울 인구는 부산과 대구를 따돌리고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권력과 경제의 집중도가 가속화된다. 이미 1952년 말 전체 법조인 858명 가운데 서울에만 440명(51.3%)이 몰려 있었고, 이들은 6대 도시에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의사의 43.9%, 약사의 65.9%가 서울에 몰려 있었는데, 1954년 말 읍·면 인구가 전체의 79.3%나 됐지만 읍·면 전체의 52.6%에는 의사가 전혀 없었다. 1955년 말 9만명 수준의 대학생 중 절반에 해당하는 4만2666명이 서울에 집중돼 있었다.

이같이 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엽부터 급격한 도시화와 서울 집중이 가속화됐던 배경에는 정치·경제적인 이유가 컸으나, 심리적인 이유도 없지 않았다. 도시전문가 손정목에 따르면 '1950년대 전반기 때 이 땅의 도시 인구 집중에 미친 영향 가운데 가장 큰 요인은 시골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구나 부산 등지로 피난을 떠남으로써 자기 고향 이외의 터전에서도 살 수 있다는 경험, 도시에서는 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아울러 '많은 시골사람들이 서울을 비롯한 도시로 피난을 떠났다 돌아온 피난민들을 맞아 서울 사람도 별 수 없더라, 자기도 서울만 가면 서울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을 체득했다는 점과, 곧 그러한 체험이 그 후의 급격한 도시화를 초래한 심리적인 원동력이 된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시화와 인구의 이동이 가속화되면서 무엇보다 시급해진 것이 운송 수단에 대한 수요였다. 1955년 9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국산 자동차가 시발(始發)이었다. 미국 지프의 4기통 엔진을 재생하고 실린더헤드만 국산화한 이 자동차는,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며 2700여대가량이 생산됐다.

택시는 그 이듬해부터 국내에서 조립 공급돼 점차 대중화됐다. 1956년에는 서울에만 모두 5335대의 자동차가 굴러다녔는데, 그 중 승용차는 1439대, 트럭 1248대, 지프 1031대, 버스 810대 등이었다.

이처럼 자동차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교통사고 또한 잇따랐다. 1959년 전국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총 6319건으로 2215명이 사망하고 7066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가운데 자동차에 의한 사고는 85.3%를 차지했다. 같은 해 서울 시내에는 처음으로 교통신호등이 등장했으며, '운전사의 날'도 처음으로 제정돼 무사고 운전자에 대한 표창을 실시했다. 전쟁이 남긴 상흔도 점차 그렇게 아물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전쟁으로 파괴된 채 아직은 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경제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됐다. 때마침 미국의 원조가 단비처럼 쏟아졌다. 한국경제의 재건과 더불어 경제계의 자본 축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의 대한 원조 규모는 과연 어느 정도나 됐던 것일까. 미국의 대한 원조는 해방 이후 1961년까지 약 16년 동안 경제원조만 30억달러 이상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연간 2억5000만달러 내지 3억달러의 군사 원조가 공여되고 있었다. 이렇듯 미국의 원조가 근본적으론 군사 원조이고 냉전체제와 관련된 것이기는 했으나,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에 비춰볼 때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미국의 원조가 경제계의 자본 축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다음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였다. 우선 직접적인 방식으로, 기업이 원조 자금이나 원조 물자를 배당받거나 혹은 경매 입찰을 통해 매입하는 경우였다. 물론 배당이나 입찰 모두 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공정 환율과 실세 환율의 차가 워낙 컸기 때문에 형식과 상관없이 기업은 많은 이득을 남길 수 있었다. 또 이러한 원조 방식을 통해 당장 생산활동에 필요한 원료나 시설재 따위를 구할 수도 있었다.

나머지 방식은 원조에 의해 형성된 대충자금을 통한 것이었다. 이 대충자금은 정부의 재정투융자의 주요 재원으로 활용돼 그 일부가 은행을 통해 대출돼 나감으로써 기업이 자본을 형성하는데 주요 기반이 됐다.

원조 자본은 이 땅에 서서히 소비문명을 심어가기 시작했다. 미국 원조의 주종이 소비재가 대부분이었던 터라 달러를 얻어봤자 소비재 부문이 아니면 달리 갈 데라곤 없었다. 더구나 당시 기술의 수준이나 기업의 체질로 보더라도 소비재의 유통이나 단순한 가공의 소비재산업이 아니고선 투자할 대상조차 없는 실정이었다.

당시 소비재산업의 대표 업종은 제분, 제당, 시멘트와 같은 3분(三粉)산업이었다. 여기에다 일제 강점기부터 학습과 단련으로 다져온 방직업을 더한 4개 업종이 당시 우리 산업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었으며, 이른바 '4대 광맥'으로 불렸다. 오늘날 내로라는 대기업의 대부분이 바로 이 4대 광맥 속에서 기업의 근육을 키워냈던 것이다.

이 시기야말로 한국기업 성장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의 식민 지배 속에서 뒤늦게야 출발한 한국자본주의가, 비로소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 이러한 전환점은 결국 기업의 운명마저 바꾸게 된다. 기존의 상업자본에 안주하며 그 안에서 변화를 모색하던 기업들은 대부분 경쟁에서 밀려났다. 반면에 시대의 흐름을 쫓아 재빨리 산업자본으로 체질을 바꾸고 호흡했던 기업들은 그만큼 성장 속도를 더 올릴 수 있었다.

산업자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또한 우호적이었다. 상업자본에 머물지 아니하고 과감히 산업자본으로 체질을 바꿨던 기업들은 무엇보다 생산적인 부분이 용이했다. 대부분 원조 물자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만큼 당시 구하기 어려운 원자재 확보가 상대적으로 손쉬웠다. 한창 물자 부족으로 저마다 아우성을 치던 시절이라 공장에서 생산하기 바쁘게 불티나게 팔려나가, 별반 어렵지 않게 짧은 기간 안에 자본을 축적해나갈 수 있었다.

실제로 이때 자본을 축적해서 크게 성장한 재벌 가운데 경성방직의 김연수와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을 제외하면, 그 이전부터 대자본의 기업가는 전무한 상태였다. 모두가 이때 비로소 새로이 거대 자본을 형성한 기업들이다.

1950년대 들어 재벌로 크게 발돋움한 기업가 대부분은 해방 이후 미군정기와 한국전쟁 시기에 무역업을 영위했다. 삼성 이병철, 삼호 정재호, 개풍 이정림, 대한산업 설경동, 락희 구인회, 태창 백낙승, 동아 이한원, 화신 박흥식, 전방 김용주, 천우사 전택보 등이 그들이다. 이 밖에도 주력 업종이 아니긴 하였으나 삼흥실업 최태섭, 동양 이양구, 금성산업 김성곤, 한국생사 김지태, 삼양사 김연수, 극동통상 남궁련, 중앙산업 조성철 등도 한국전쟁 전후 부분적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기와 한국전쟁을 치른 8년여 동안에는 생필품 등 물자가 극도로 부족했던 터라 일본이나 홍콩 등을 통한 무역은 이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다주었다. 특히 미군정기에는 공산화되기 이전의 중국 대륙이나 마카오, 홍콩과의 무역이 활발했다. 주로 수산물과 광산물을 수출하고 생고무·종이·면사·화공약품·의약품 따위를 수입했다.

한국전쟁기에는 중국 대신 일본과의 무역이 활기를 띠었는데, 광산물이나 고철 또는 탄피를 녹인 놋쇠를 주로 수출하고 의복·화장품·직물류·장식품 따위를 들여왔다. 1950년대의 기업들이 재벌로 크게 발돋움하는데 필요한 자금은 주로 미군정기와 한국전쟁을 치른 8년여 동안 대부분 무역으로 축적된 것이었다.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축재 수단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갖은 역량(?)을 발휘해서 은행 대출을 끌어오기만 하면 가만 앉아서도 금고를 늘릴 수 있었다. 당시 은행 금리가 13~17% 수준인데 반해 물가는 해마다 30~40%까지 치솟은 때였던 만큼, 은행 대출은 인플레가 스스로 알아서 갚아주고도 남았다.

따라서 당시 은행 대출은 곧 특혜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은행에서 돈만 끌어오면 돈놀이를 하든, 부족한 물자를 만들든 간에 금고를 늘려나갈 수 있는 건 시간문제였기 때문에 은행 창구는 늘 문전성시였다. 하지만 그것도 '빽'이 있을 때나 가능한 애기였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은행 근처에도 얼씬할 수가 없었다.

흔히 현대경영에선 부채도 자산 구실을 한다고 일컫는다. 빚이 늘어나면 자산이 그만큼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늘어나는 마술을 부린다. 복식부기에 따르면 부채가 늘어나면(貸邊) 그만큼 자산이 증가하기 마련이다(借邊). 비록 빚을 얻어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곧 설비시설이나 원자재 운영자금과 같은 자산의 형태로 변신을 하면서 더욱더 많은 이득을 창출케 된다. 한데 그 당시만 하여도 이 같은 회계상의 마술을, 자산의 속살까지 속속들이 이해하는 기업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밖에도 미군정기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1950년대 재벌이 탄생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절호의 기회'는 적산기업의 불하였다. 적산기업과 줄이 닿으면서 불하받게 된 재벌만 해도 여럿이었다. 한국생사 김지태, 전방 김용주, 한국화약 김종희 말고도 동립산업 함창희, 동양방직 서정익, 동양맥주 박두병이 적산기업의 관리인으로 있다 불하받으면서 일약 재벌로 성장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전쟁 복구 건설경기 또한 한몫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현대건설 정주영, 대동공업 이용범, 중앙산업 조성철, 흥아공작소 양춘선, 대림건설 이재준, 극동건설 김용산 등이다. 이들은 모두 전쟁 복구 건설경기의 붐을 타면서 재벌의 반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요컨대 1950년대는 한국자본주의가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해가면서, 동시에 재벌을 탄생시킨 태동기였다. 이후 전개될 한국의 산업혁명(?)을 위한 체질을 강화시킨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동력은 대부분 무역에서 얻어진 막대한 이익이었다. 여기에 다시 미국의 원조가 우호적으로 집중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의 재벌 형성은 경제적 원리보다는 그 바깥 요인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당시의 재벌들은 자본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파행성을 띨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른 사회적 비판이 뒤따르게 되는 단초가 됐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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